그러다 한참 지난 후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데 얼마 전 내가 겪었던 것이다.
저 사람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내가 몇 달 전에 겪었던 것과 똑같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지금 당장 한마디 거들고 싶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사람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으니 마치 내 마음을 읽어 주는 것처럼 속이 후련해진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다.
저 사람은 그렇게 당당히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왜 나는 그때 그 말을 못 했을까.
또다시 나는 나를 갉아먹는 생각에 빠져 버린다.
상대가 용기 낸 자리에 나라도 한번 거들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괜히 그 사람한테도 미안해진다.
이게 내 습관인 것을 알지만, 참으로 답답하다.
며칠 고민하다 나도 힘을 내기로 결심했다.
그간의 내 심정을 담아서 대표에게 마음을 표현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한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고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말을 전한다. 사실은 내가 먼저 했어야 됐는데, 나를 갉아먹으며 보낸 시간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일이 생기니 그 사람은 바로 자기 생각을 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힘이 난다.
그래 지금이라도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보자.
내향적이고 생각이 많고 사회적인 장면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자신이 경험하는 부당하고 불리한 상황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선뜻 자신의 의견을 비추기보다는 혹시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자기만 후벼 판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고 공동의 문제인 경우가 있다.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가져와서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과 같다.
실험카메라를 본 적이 있다.
장애인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커피를 쏟자 자신의 옷에 커피를 묻혔다며 대노하는 여성.
이 여성에게 시민들이 보이는 반응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하는 장면에서 몇몇은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몇몇은 아주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나치는 몇몇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인 이유도 있고, 얼핏 봐도 여성이 너무 세니까 괜히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 이유도 있어 보인다. 또는 그 장면이 눈에 쉽게 보이지 않아서 자기 갈길을 바삐 가는 사람들도 많겠지.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무딘 사람을 탓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피하는 경우, 이럴 경우에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들 외에 용감한 시민들은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상황을 파악하려 했고, 장애인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에게 참 교육을 실시하거나, 대신 세탁비를 줄 테니 가라고 한다거나 등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어쩌면 가장 당연한 모습일 텐데 우리는 그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멋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