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를 잘 끊어 내고 있나 봐
"그냥 아무런 핑계도 설명도 없이 미안하다고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이 돼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니까 너무 부끄럽네. 미안해.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라는 말을 또 어길까 봐 무섭네. 그래서 더 미안해."
"..."
"... 근데 말이야... 내가 사과를 하면서도 왜 난 네가 부럽냐. 난 네가 너무 부러워."
"... 나도 잘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냥 지켜만 봐주세요."
내가 믿고 결혼한 사람이고 내 기대가 가득 찼던 것이다. 상대방은 자기 나름대로 충분히 살아내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내 마음을 훅 헤집어 버릴 때가 있다. 날이 갈수록 고집이 세진다거나, 아주 오래전의 일을 수시로 들춰내서 '그때 그랬잖아!'라며 가족들은 기억도 안나는 것을 상기시켜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 버린다.
어느 날은 자기 딴에는 격려한답시고 건넨 말이
'자신 없으면 그만두고 다른 거 가져와서 해봐.'라고 한다.
이내 아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바로 이어서 보여 줄 연주를 멈추고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편에게 있는 나쁜 습관들에는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어 옳고 그름을 심판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가로채서 자기가 부연설명 들려고 한다거나, 아무도 관심 없는 정치나 경제 이야기를 꺼내서 밥상머리에서 긴장감 조성하기가 있다.
뇌와 위가 연결되어 있다더니 밥 먹다가 불편한 내용이 나오거나 분위기가 싸해지면 나는 바로 체해 버린다. 내 위는 내 뇌보다 더 민감하다. 체기 때문에 밤을 꼴딱 새우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나와는 달리 자신과는 상관없는 양 거실 한가운데 자리 펴서 대자로 뻗어 잠든 남편을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저 인간이 나 체하라고 고사 지내서 그랬겠나'라는 생각으로 용서하려들지만 실은 이건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나의 억지 노력이다.
실은 자는 남편에게 달려가 얼굴에다가 토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가득 찼다. 그걸 대신해서 변기통을 붙잡고 싸우며 비워낼 뿐이다.
만약 자는 남편 얼굴에다가 토해버리면 아주 잠깐 그 순간만큼은 쾌감이 일어날지도 모르나, 그 이후는 더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종종 자는 얼굴에다가 토하는 상상을 하면서 진짜로 다시는 같이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날에 실행해 보고자 하는 다짐을 세우면 은근히 시원해지는 부분도 있다.
남편과 갈등이 있으면 이내 내 행동에도 티가 난다. 괜히 가족들에게 단답형으로 말한다거나 기다려주지 못하고 재촉한다거나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을 트집 잡아서 '나 화났어! 너희들 내 눈치 봐!'라고 티를 낸다. 아주 안 좋은 버릇이다.
이 버릇을 고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책상에 앉기'다. 기분이 썩 좋지 않거나 당장 대화로 풀 수 없을 것 같으면 책상에 앉는다. 일기를 쓴다거나 다꾸상자를 열어 재료들을 펼쳐 놓고 다이어리 꾸미기를 한다거나 눈에 띄는 책을 꺼내서 읽는다거나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놓고 기분을 바꾸려 든다. 이 방법들을 찾아내고 나서는 나도 편해졌지만 가족들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던지지 않을 수 있어 평화가 지속되는 날이 길어진다.
그러나 노력으로 유지하는 평화가 영원하지는 않다.
남편의 나쁜 습관들이 우리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감정 내키는 대로 분위기를 흐려 버리면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꼭 온다.
이번에는 프라이팬 때문에 한껏 열이 올라서 집에 있는 프라이팬을 다 갖다 버리는 소동을 펼쳤다.
그렇게 분이 풀리지 않자 괜히 옆에 있는 딸에게도 남편의 나쁜 습관을 빗대서 퍼붓는다. 그 순간 '아 브레이크 고장 났다!'를 알아차렸지만 어찌 된 게 쉽사리 멈춰지지 않는다. 화가 나는 순간 알아차리면 멈춘다더니 '왜 나만 늘 참아야 되는데!'라는 에고의 목소리가 내 화를 더 북돋는다.
결국엔 아빠 닮아서 진짜 꼴 보기 싫다는 말까지 내뱉은 후에야 '미쳤다!'라며 멈췄다.
딸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다.
'고집세고 자기 멋대로 하고 남의 말은 한 번에 안 듣는다. 딱 지 아빠랑 똑같다!'라는 이 말을 쏘아붙여야 브레이크가 걸리는 건가.
허탈했다.
훈습이라는 것, 수행이라는 것이 참 어렵다.
더군다나 남편에게도 똑같이 퍼부었지만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이는 모습에 괜히 약이 올라 딸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참 어렵다. 어려워!
다음 날 딸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리고 사과를 했다. 여러 경험 끝에 내가 사과할 테니 너도 사과하라는 의도는 전혀 없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강제 화해다. 상대방은 사과를 받아 줄 상태가 아닌데 괜히 내가 사과하니 수락해야 한다는 것은 억지다. 내가 그 억지를 여러 번 당해봤기에 그냥 내가 사과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다가갔다.
그리고 내 말이 길어지려고 하자 딸이 브레이크를 건다.
"그냥 아무런 핑계도 설명도 없이 미안하다고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만약 이렇게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았다면 내 카르마는 다시 반복됐을지도 모른다. 변명하고 핑계 대면서 사과하는 고약한 습관...
하루가 지난 데다 내 속에서 충분히 진정이 된 이후였기 때문인지 딸이 걸어 주는 브레이크에 잘 멈췄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충분히 담아 담담히 사과를 전했다.
그 순간 내 마음 저 밑에서 울음이 밀려온다.
'아... 나도 이런 사과 좀 받았었다면... 혼자 2~30년을 돌고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나는 내 아이에게 변명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잘했다. 은별아...'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머리로 떠올리려고 할 때는 마음에 드는 멘트가 없었다. 아니, 어려웠다. 그런데 사과하는 그 순간이 되니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과가 저절로 나오면서 그 말을 하는 나와 그 말을 듣는 딸 사이에 어떤 전기신호가 교환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에 딸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는 나도 좀 심하게 대들었던 것 같아서 미안했어요."라며 허그하자며 팔을 벌린다.
"아... 또 부럽네. 또 부러워. 근데 고맙다. 진짜 고마워."
"엄마가 자주 해 준거잖아요."
'....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