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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Apr 02. 2020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

 지난 2월 17일 전북 남원시 사매 2 터널에서 다중 추돌로 5명이 죽고 43명이 부상하는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고속도로 관리공단은 결빙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그날 아침 내린 눈이 결빙되어 일어난 스키드가 아니라면 사고 난 원인을 해석할 수 없었다. 시선을 끈 기사는 사고 자체가 아니라,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58세 운전사 박 씨에 관한 다음의 내용이었다.


 박 씨의  처남 최모(53)씨는 “사고 소식을 접하고 매형이 아니길 빌었다”라며 “반복적으로 다니던 길인 데다 시속 90㎞ 이상 속도를  내지 않는 평소 운전 습관으로 미뤄 크게 다치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화물 트럭뿐만 아니라 자신이 몰던 그랜저 승용차도 평소 시속 90㎞ 이하로 운전했다고 한다.(기사 원문보기)


 자칭  지식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통에,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랬기에 제주에서는 주유소에서 펌핑도 하고,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생 학원 차량을 운전하며 최저임금을 받는데 전혀 문제를 못 느꼈다. 운행시간이 타이트하고, 아이들이 제  시각에 안 나타나는 게 스트레스였을 뿐, 운전하는 일 자체야 힘들 것도 없었다. 지난 9월 미 대륙횡단 여행을 하면서 시야를 가릴 정도의 폭우  속에서도, 깜깜해서 차선이 잘 안 보이는 밤중에 로키산맥을 넘으면서도, 18일 동안 8천 마일을 넘게 운전하면서 아무 일 없는 사람 아니던가.


 사회  초년병 시절에 담당하던 컴퓨터실 교대근무를 제외하면 운전은 평생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쉬웠다.  그랜저는 이민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웬만한 회사의 사장님이 기사를 두고 쓰는 최고급 승용차였다. 직원이 3만 명이 넘는 회사의  사장도 출퇴근 차량이 그랜저였다. 운전사라는 직업이 개인 자가용으로 그랜저를 쓴다고 뭐라 할 수 없다. 직업에 귀천이 없지  않은가. 단지,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거다. 그만큼 한국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뿐이다.


 기사에는 박 씨의 30대 아들의 말도 있었다.   “아버지가 외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하셔서 올여름 가족과 함께 필리핀 세부로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라며 “평생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아버지께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이제 할 수 없게 됐다”라고 울먹였다.


 밀레니엄을  코앞에 두었던 1999년 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맨해튼을 평생에 한 번이라도 가보지 못하는  미국인이 절반을 훨씬 넘는다는 기사가 믿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거주하는 스테이트 밖으로 여행한 적이 없는 미국인도  있다며, 그런 미국인들이 밀레니엄을 맞아 맨해튼 타임스퀘어로 몰려온다는 기사였다. 여행이 부를 상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심하다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카펫 클리닝가이'를 뉴저지에서 만난 적도 있다.


 한국의  언론이 전하는 기사를 보면 한국은 경제가 당장이라도 무너지는 나라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사람 외에는 안 보이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동산에 상대적 박탈감이 어떻고,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힘들고, 취업난을 겪는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불평한다지만,  역이민자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의 하나가 한국이다. 1990년생으로 이제 대기업 대리에 불과한 조카는 요즘  골프를 배울 궁리 중이다. 한국에서 그랜저를 갖거나, 골프를 치는 것은 미국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배기량에 따라 세금도  다르고 미국에는 없는 특별소비세가 있기 때문이다.


 비싼  부동산도 그 값에 사는 사람이 있기에 비싼 것이고, 사교육도 마찬가지며, 헬조선이라는 청년들의 불평도 한국어 자격증 취득에  목매는 외국인을 보면 부잣집 도련님의 어리광만 같다. 사회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양극화가 문제일 뿐이지, 나라의 경제는 잘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호도하는 건 잘못이다. 언론은 경제를 탓할 게 아니라 양극화와 불평등의 문제를 공론화시켜야 옳다.  최저임금 상승만 탓할 게 아니라, 감당하기 힘든 임대료 상승에 초점을 맞춰야 정당하다.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그것을 초과해서 소비하면 궁핍할 수밖에 없고, 나처럼 가진 게 없어도 분수를 지키며 살면 풍족하고 여유로운 게  세상 이치다. 인간의 탐욕에 끝이 있을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자산은 분수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실패를 몇  차례나 겪었어도 지금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잘 살아야 국민이 만족할까? 얼마 전에 본 기사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3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구매력평가(PPP·Purchasing-Power Parity)를 기준으로 한 한국의 1인당 GDP가 2017년 기준,  4만1001달러(약 4,890만 원)를 기록했다. 일본은 4만 827달러로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 관련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1970년 이후 50년 만의 첫 추월이다. 2018년 잠정치에서도 한국은 일본보다 우위에 섰다. 한국 4만 2136달러, 일본은  4만 1502달러다.(기사 원문보기)


 한국이  일본보다 잘살게 되었다니! 우리 세대에겐 꿈과 같은 일이 이미 3년 전에 실현되었다는 게 감동을 주었다. PPP는 물가와 환율을  적용한 실질 구매력으로, 명목상 구매력에서는 일본에 아직 못 미친다. 하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감하는 경기는 명목상이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미국보다 PPP가 높았던 일본은 이런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코로나에 눌린 탓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는 몰라도 주요 뉴스로 취급되지 않았다.


 1970년대  초 용산에 살았던 나는 아침에 버스 타러 지나갈 때마다, 신용산 사거리의 그레이스호텔 로비에서 모닝커피를 들고 웅성거리는, 속칭  기생관광을 온 단체 일본인 중년 남성들을 자주 목격했었다. 36년 굴욕의 역사를 가진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능욕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후손들은 두 번 다시 그런 치욕을 겪지 않을 것이다.


 <후기>

 아무리 날이 차도 3월이면 봄입니다. 뒷산에는 하얗게 핀  산수유가 보이고, 차가운 새벽바람에도 훈기가 서려서 뛰는 도중에 웃옷을 벗어 허리에 묶어야 땀을 다소나마 덜 흘릴 수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시끄럽지만, 저에게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일상입니다.


 한국이  잘 사는 것은 쓰레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멀쩡한 삼단 스토리지를 보고 주어왔습니다. 전자제품  다루는 게 취미라서 각종 케이블 같은 잡동사니가 많은데, 미국에서부터 갖고 있던 게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서 바꾸려던 참이었습니다. 버려진  것을 주워와서 사용하고 가지고 있던 것을 버렸습니다. 몇만 원을 절약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운동하러 나가는 길에 보는 버려진 식탁이나 소파는 너무 멀쩡하고 고급스러워서 바꿀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혼자 가져올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 있는 것을 처분하기도 곤란해서 포기했습니다. 경제가 나빠서 살기 힘들다는 사람은, 제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살기 때문은 혹시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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