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을 모르는 임원들. 사실 회사를 모른다.
권태기 "임원들도 과거엔 엘리트였다."
일정 규모 이상의 모든 기업에는 정보 시스템이 존재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필요한 정보 시스템이 늘어난다. IS(Information System)라고 통칭은 하지만 필요 부서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 합쳐진 시스템들이 존재하고 또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하기도 한다. 정보기획 전문가는 아니니 일일이 나열하기는 한계가 있을 정도다. 이 시스템은 사내에서 사업 아이템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보성 Event를 정리하고 그것을 Reporting한다. 개인업무관리, 사업부별 공장자동화, 물류, 회계, 인사, 생산관리, 구매, 자재, 원료, 경영기획, 지적재산, 문서 등등 기업의 규모나 사정, 필요에 따라 수많은 결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시스템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사실상 회사가 돌아가는 대체적인 윤곽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얘기는 아니다. 단순히 오래 재직했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리부문에 있어야 간신히 감이나 잡을 수 있는 그야말로 짬에서 나오는 Vibe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적인 조직의 임원이라면 대충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상적이지는 못하더라도 정상적인 조직의 임원이라면 정말 대충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21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나 가능한 얘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임원이라면 얘기는 달라져야 한다. 몰라도 알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몰랐어도 경험으로 인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금세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 사업 부문에 대한 전문가로서 사업을 기획하고 조정하고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 회사 전반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물을 수 있지만 그래야 한다. 현실에선 특정 부분에 대한 전문가로서 사업을 기획하고 조정하고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임원들을 생각해보자.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전체 기업에 재직 중인 임원들을 놓고 봤을 때 100명 중 1명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사정이 그렇다면 임원으로서 임원 외 구성원들보다 나은 부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양심이 있다면 말이다. 실무에서 벗어난 임원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부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두가 인식하고 있듯 우리 주변의 임원들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특정 사업부문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관록이 부족하다면 선배로서 내외부 커뮤니케이션, 협력,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쉽게 말해 조직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업부나 조직과의 협력을 이끌어 낼 줄 알아야 하고 눈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은 사람이라면 임원 자리에 앉아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설마 기업의 임원이라는 사람들이 이 정도일까 싶겠지만 현실은 더욱 심각하다.
어느 기업이든 비슷한 상황이다. 현재 임원들은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을 졸업한 세대들이다. 그 전 세대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60년대, 70년대를 거쳐 대한민국 산업성장의 기초를 세우던 선배 세대들은 전후 새마을 운동을 거쳐 독재정권을 견디며 경제의 규모를 키우기 위한 산업논리 안에서 급속한 성장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막연함과 세계 시장의 아득한 거리를 느끼며 고통을 감수했다. 진짜 몸으로 하는 생고생을 하던 세대다. 이후 세대인 현재 임원들은 규제도 최소, 관련 법도 최소, 기업지속성을 위한 세계적 움직임도 최소인 상황에서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아스팔트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추천인재로 기업에 우선 면접기회를 받아가며 기업에 탑승한 그들은 뚜렷한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없어도 성과를 인정받고 있었다. 단지 지금보다 열악한 업무환경 속에서 불편한 사무실 생활을 견디는 것이 고된 직장생활의 6할 이상을 잡아먹던 세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실들을 모른다. 그저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으로서 선진국을 향해 달릴 때 피흘리고 땀흘리던 산업역군으로만 기억한다. 물론 제조업이 경제 성장의 정점이자 꽃이었고 가장 중요하고 제일 높은 비중을 차지하던 그때, 눈앞에 있는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고 군대와 완전히 동일한 조직문화 속에서 이유없는 야근으로 시달리던 경험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현재의 임원들이 직원으로서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을 때부터 기업은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90년대 말부터 그 전까지의 무분별한 산업 우선논리, 열악한 세법, 노동법 체계 등 기업을 둘러싼 각종 이슈들은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전 세계가 문제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 수많은 국제법과 자국법을 고치고 수정해 세계표준을 제시하고 있었다. 뒤늦게 그 흐름을 좇아야 하는 대한민국으로서 더 이상의 성장위주의 논리를 고집할 수는 없었고 폭발적인 성장은 더뎌지기 시작했다. 규모가 커져버린 기업들은 더 이상 막무가내식 업무처리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수많은 규제와 IS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과장~부장 등 정직원의 정점에 있었던 그들은 과도기를 겪는 것이 낯설었다. 그들에게 IS 도입은 번거로운 것이었고 귀찮고 힘든 것이었다. 당시 임원들과 함께 요술방망이(또 하나의 수작업의 탄생)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수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었다. 결국 맨땅에 박치기하는 마음으로 당시 실무진들이 짧게는 수개월부터 연단위까지 IS 도입에 매달려야 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적용시킨 시스템은 이십여 년이 흘러 모든 업무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회사의 내부를 수시로 점검할 수 있는 CCTV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임원이 되었고 과거 선배들의 피와 땀 위에 자리를 잡고 모든 것을 보상받아왔다.
이십여 년이 흘러 완전히 정착한 다수의 IS는 지금의 팀장급들부터 이하 후배들이 시간을 바쳐 도입하고 적용하고 개선시켜 왔다. 모든 보고자료의 Raw Data는 이들 IS에서 뽑아 정리한다. 하지만 도입과 정착의 공은 모두 지금의 임원들에게로 돌아갔다. IS를 전혀 모르는 그들의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여전히 IS는 아랫것들이나 만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전히 IS의 구조조차 이해를 못하고 그 안에 어떤 것들이 흘러 다니며 자료가 되어 본인의 책상으로 올라오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고생(?)에 대한 보상뿐이다.
선배들이 해놓은 것을 마치 본인들도 함께 피땀흘리며 이룩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실제로 선배들보다 열심히 일한 것도 아니고 현재의 후배들보다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니다. IS도입 시기부터 그들은 말로만 일을 해왔고 빠른 성장에 힘입어 일찌감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행운아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관심은 고생(?)에 대한 보상뿐이다. 사실 선배들의 신념같았던 회사에 대한 무한 열정이나 애정, 충성심은 지금 임원들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회사에 대한 관심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후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저 철없고 이기적인 요즘 것들이 하는 건 답답하다는 생각뿐이다.
IS 도입 당시
"그거 도입한다고 했을 때 난 반대했었어. 비용이 장난이 아니거든. 그리고 그런 걸 배울 시간이 있냐고. 너희들은 젊으니까 머리에 들어왔겠지."
현재
"야, 너네 그 시스템 있잖아. 거기에 이렇게 훌륭한 데이터들이 나오는데 너네는 이거 활용도 안 하고 어떻게 일을 하고 있었냐?"
그들은 십수년 째 그 시스템에서 추출해 분석한 자료로 보고받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바보들의 행진이 아니라 수억의 연봉을 받는 실제 회사 임원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