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변산 마실길을 걸을 때다. 늦은 출발에 마음이 조급해진 탓일까?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풍경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날씨가 더 문제였다. 6월이라고 만만하게 봤는데, 한낮의 햇빛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숨 막히게 더운 것도 모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계속 이렇게 걷다가는 마실길이 저승길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걸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걷는 것뿐이었다. 일단 그늘까지만이라도 걷자. 쉬더라도 그늘에서 쉬자. 그런 마음으로 쉼 없이 걸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그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흙길만 펼쳐져 있었다.
나보다 아내가 먼저 지쳤다. 아무래도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햇빛 아래에서라도 잠시 쉬어야겠다. 잠시 쉬었다 가자. 그 말을 꺼내려는 찰나, 간발의 차이로 아내가 주저앉았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앉은자리가 지옥의 불구덩이 같았다.
하염없이 길 위에 계속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마지막 기운을 짜낸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내디딘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늘 없는 흙길이 끝나는 곳에, 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계속 가려면,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첫발을 막 들이밀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지친 다리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뭔가 있다. 뭘까? 주변을 둘러보니, 백구 한 마리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구는 나무 그늘 아래, 자기 집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난 또 뭐라고? 개 때문에 놀라다니. 개가 묶여있는 줄로만 알았다. 인기척을 느낀 개가 벌떡 일어선다. 목줄이 풀려있다. 목줄이 아예 없다.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내 앞을 막아선다.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내 전략을 눈치챘는지, 백구가 갑자기 내 오른손을 덥석 물었다.
“자기 괜찮아? 지금 개가 물은 거 아냐?” 뒤에 있던 아내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내가 지금 개에게 물린 건가? 그런데 물린 부위가 하나도 안 아프다. “괜찮아. 물린 거 아냐. 개가 심심했나 봐. 잠깐 놀아달라고 그러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세게 문 게 아니라, 손을 살포시 움켜쥔 정도다. 지긋이 개를 바라본다. 놀아 달라는 개가 너무 침착하고, 의젓하다.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앞길을 막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얘가 왜 이러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무언가가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우리 앞,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길을 막아선 백구 바로 앞이었다. 백구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딱 마주쳤을 타이밍이다. 뱀이었다. 그냥 뱀도 아니고, 빠른 뱀이었다.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뱀을 본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뱀이 그렇게 빠른지는 처음 알았다. 너무 빨라서 뱀이 맞는지 순간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떤 종류의 뱀인지, 독사인지 아닌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뱀은 개집 쪽에서 튀어나와서, 마당을 가로지른 후, 사람 사는 집 쪽을 향해 달려갔다. 너무 빨라서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 벽에 한 번 부딪히고 나서야 가까스로 멈춰 섰다. 충격이 상당했을 것 같았는데, 뱀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꾸물꾸물 움직이는가 싶더니, 유유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뱀이 사라지는 마술을 본 것 같았다. 그동안 나도, 아내도, 백구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백구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내 손을 물고 잡아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놀아보자는 걸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쨌든 백구가 우리를 구했다. 생면부지의 개에게 신세를 졌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고마웠다. 뱀은 눈앞에서 벌써 사라졌지만,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백구도 이런 마음을 읽었는지, 물었던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백구가 갑자기 걷기 시작한다.
뱀에게 겁먹은 우리가 미더웠던 걸까? 백구가 앞장서서 길을 걷는다. 마냥 걷기만 하는 게 아니다. 틈틈이 주변을 경계하는 것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다. 간격이 벌어지면, 멈춰 서서 기다리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제자리에 멈춰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자기만 믿고 따라오란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무작정 뒤를 쫓았다. 보면 볼수록 기특하고 놀라운 개였다.
저 개가 정말 알고서 저러는 걸까? 백구의 능력에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나였다. 일부러 방향을 살짝 틀어 보았다. 쫓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보았다. “컹컹!” 백구가 멈춰 서서 짖는다. 우리 앞에서 단 한 번도 짖지 않던 백구가 우렁차게 짖는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란다. 모른 척 무시하고 계속 딴 방향으로 걸어 보았다. 그랬더니 백구가 갑자기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단숨에 우리를 앞지르더니, 멈추어 선다.
정말 이쪽으로 갈 거야? 백구가 입을 치켜뜨며 묻는다.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앞장서서 걷는다. 방향을 재탐색한다. 잠시나마 백구를 의심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백구를 믿고 묵묵히 따라가기로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풀이 우거진 길이 끝나고, 도로변이 나타났다. 마실길은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변 쪽으로 합쳐지고 있었다. 도로가 나타나자, 잘 걷던 백구가 자리에 멈추어 선다. 다소곳이 그 자리에 앉는다. 여기 까지란다. 자기 할 일은 이제 끝났단다. 이제부터는 둘이서 알아서 가란다. 어르고 달래고 불러도 소용없다. 꼼작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수는 없는 일. 고맙고, 기특하고, 신기해서,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미안해.” 아내가 빵 한 조각을 뜯어 백구 앞에 던져주었다. 관심 밖이다. 아예 입에 대지도 않는다. 오히려 섭섭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는 눈빛이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란다.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각자의 길로 되돌아갈 시간.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백구가 먼저 등을 돌린다. 우리만 남겨두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아내와 둘이서 다시 마실길을 걷기 시작한다. 돌아보지 말자고 했던 아내가 약속을 깨고 먼저 뒤돌아본다. 한 번쯤은 백구가 뒤돌아보지 않을까? 아내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야속한 백구는 묵묵히 자기 길을 간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사라져 간다. 여기저기 풀숲에 오줌을 지리면서, 새로운 여행자를 맞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