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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Mar 18. 2017

별별 예찬, 그래 이곳!

런던 여행 12 - 색, 형태, 있어야 할 위치 모두 섬세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기한 "왜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태에 진입하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에 빠져버렸는가? 질문은 비단 독일에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계몽의 망령은 제국주의의 망토 속에서 나치로 부활했고 식민 지배구조에서 뻗어 나온 영국의 문화도 이 맥락에서 불편하기 그지없다. 불편하지만 이곳에서도 이미 계몽은 종말을 고했고 성공한 '지식채널 e' 프로그램처럼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과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를 다양하고 엉뚱한 곳에서 힘차게 뿜어내고 있었다. 눈치가 백 단! 시대 흐름에 호응하는 자세는 구백 단! 이 여름 런던의 공공건축이 보내는 메시지는 충분히 향유하고 만끽하고 눈여겨볼 만했다.


공공건축이라 말하고 비를 피할 수 있는 대기 공간,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공원, 대담한 채색의 건물, 오래된 여전히 새로운 건물, 누구나에게나 베풀고 있는 문화적 혜택 그리고 건축의 힘, 무엇보다 현지인 관광객 모두에게 헌사된 예술품이라고 일일이 쓰면서, 이런 곳에서 나는 수도 없이 "맞아, 그래 이곳!"하고 외치곤 했다.


예를 들면 이곳, 대영 박물관이 아니라 바로 그 앞, 관람객이 대기할 수밖에 없던 옥외 마당에 새로운 천정을 덮어 씌운 노먼 포스터 (Norman Foster)의 건축 같은 거랄까! 저 푸른 지붕 아래 관람객이 영국의 날씨에 혹사당하지 않게 되고, 약탈 유물 박물관이라는 오명을 받은 건물을 이 '위대한 마당 Great Court'의 힘으로 조금은 견딜만한 공간으로 만든 그런 공공 건축을 예찬한다.



아름다운 공공건축에 감사하는 이유는 그런 미적인 감각과 미적인 환경을 경제의 논리로 환원시키지 않기 때문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그 건축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인 향유가 어떤 특정 집단을 위하지 않기에 정신적인 풍요가 고루 분배되는 느낌, 그래서 비록 현재의 삶이 미래가 안 보이는 기약 없는 삶이라도 조금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음에 품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이런 '세인트 판크라스 역사'에서 처럼 말이다.



노먼 포스터의 'Great Court'처럼 아름다운,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살아 있는 듯한 구조로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던 저 역사와 유사한 건물이 한국에도 있다. 나무로 지어진 이 건물은 세계 100대 플래티넘 클럽 순위에서 무려 31위를 차지한 해슬리 나인브리지 건물이다. 골프 클럽, 멋진 로비,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여주에 있지만 수십만이 같이 볼 수 있는 서울역 역사에도 무척 어울릴만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나도 너 사랑해~~" "독도는 우리 땅!" 이런 낙서가 기둥마다 새겨질지도 모르지만!



공원,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공원은 어떨까? 조금은 녹지, 멀지 않은 곳에 햇살 받으며 책 한 권 읽을 수 있는 곳,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이 조금 쉬어갈 수 있는 곳, 쉴만한 물가 같은 곳이 계획적으로 조성된 곳, 이 많은 런던의 공원을 예찬한다. 물론 어떤 공원은 해당되는 주변 건물의 실거주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듯 특별한 열쇠가 필요했던 공원도 있었다. 그러나 고층건물과 빠른 생활 리듬과 높은 물가고라는 면에서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면모를 지닌 도시에서, 내가 지나왔던 어떤 유럽 도시보다 대도시다운 런던에서 이런 유유 적적 한 공간이 지천인 곳도 없었기에 이곳도 엄지손가락 척! 하이드 파크의 축소판 같은, 어쩌면 궁전의 작은 정원처럼 자그마한 분수와 입상 한 개와 한 줄짜리 바로크 스타일 나무가 둘러쳐 있는 그런 정원이 펨리코 역에서 나와 10분도 되지 않은 곳에 도서관과 학교와 함께 갖춰져 있다. 물론 이 여행자의 시선이 저 공원이라는 표상이 그날 건넨 많은 인상에 의존하는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자그마한 것을 눈여겨보는 것은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지만 홀로 건 둘이건 결국은 개개인의 시선의 차이일 것이다.

개똥을 수거하는 착한 마음에 불을 지피는 배려, "그 개똥 여기다 버리시고 편히 가세요~"와 같은 푯말을 보았을 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개똥 봉지만 쌓여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 톤 다운된 멋진 다홍색 쓰레기통 옆으로 마구 자라난 나뭇가지도 황폐한 인상을 더하고 있었지만 나름 시크했다. 성적 정체성을 남녀로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스웨덴의 화장실 표식이라든가 애견문화를 볼 수 있는 거리의 이런 상징적 신호들을 보면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그대로 드러난다. 다수의 그늘에서 소외당한 이들에 대한 배려는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주기에 아마 사회가 성숙해 갈수록 못 보던 푯말과 표식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또 어떤 표식이 있지? 하며 그러는 사이 나는 어느새 도시 산보자가 되어 있었다.



서울처럼 최첨단 도시에 북촌 같은 조선시대의 건물이 포진해 있다면? 단연코 멋지다. 우와~~5대 궁이 포진한 대도시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중력 법칙에 굴복하는 피부를 지니고 소화기관과 배설기관에 의존해 살아가는 유기체인 인간처럼 그 태생이 유기적인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렇게 살아왔던 결이 있고, 화마에 수해에 생채기 난 흔적이 고스란히 몸에 박혀 있지만 보살펴주는 들기름 한 병에 번쩍번쩍 광택이 난다. 그래서 그곳에 살아보고 싶고 그 주변에서 괜히 어슬렁거려도 화보가 될 것만 같은 그런 곳이다. 족히 백 년은 거뜬히 넘길 것만 같은 철근과 콘크리트와 유리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몸에 싣고 있는 나무 건축은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나 참 매력적이다. 여기 런던 한가운데 리버티 백화점이 그렇다. 나무로 지은 전원주택 같은 백화점!


 계단은 삐걱거리고 아직도 아르누보 형식의 세부 장식이 시대를 거슬러 아름답고 고색창연하다. 리버티 원단으로 한복을 만들면 어떨까 싶어 작정하고 찾아갔지만 전무했던 사전 지식 덕분에 적잖이 흥분하게 되었다.



백화점에서 꽃을 팔던가?... 긴 줄기를 싹둑 자르고 비닐과 오색 한지와 몇 가지 리본으로 묶어 건네는 채도 높은 꽃다발 말고 긴 줄기 그대로, 재생종이 한 장에 둘둘 말아주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자연스러운 꽃 묶음을 그것도 이런 백화점에서 보니 유달리 낯설고, 낯설지만 반갑고, 보고 있기만 해도 세상 부자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다.

가장 사치스러운 소비라면 일주일에 한 번씩 생화 한 다발? 시들어가는 모습 끝까지 화병 한가운데서 도도하게 서 있을 굵은 가지의 그런 꽃묶음과 연기처럼 공중으로 사라질 향수? 리버티 백화점에서 덧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사회적 배려가 기중기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 "Deus ex machina", 연극에서 사건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기중기를 타고 신이 내려와 일사불란하게 일처리해 주던 데서 비롯된 말이나 저 기중기를 보니 갑자기 이 연극 용어가 생각났다. 신이니 어떤 일이든 척척 해결할 것은 뻔한 일, 신의 이름으로 하는 일에 누가 어떤 이의를 달 수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이 용어는 '획기적인 방안'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정말 획기적이지 않나? 밧줄 하나에 대롱대롱 유리벽 청소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이쿠... 저러다... 자칫 잘못되면.... 못 보겠다..."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위험한 일이나 상대적으로 비싼 일당에 꿀 알바로 분류된다는 말에 씁쓸하기도 했다. 바로 여기에 그 해답이! 인권을 생각하면 당연히 방법은 있는 거!



색으로 기억되는 도시. 노란색 구급차, 빨간색 시내버스, 빨간색 우체통, 주황색 건물, 연두색 건물

런던의 색은 채도가 높았다. 톤 다운된 색보다는 파스텔 색감조차도 채도가 강해서 산뜻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그럴지도 모르고 국민적 성향이 반영된 색감일 수도 있다. 이 도시, 산뜻하고 그래서 별별 예찬!


그래, 이곳!

글, 사진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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