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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May 07. 2023

혼술 예찬

피곤한 하루였다. 무려 어린이날. 심지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런 날이었다. 아침 10시쯤 집에서 나가 미리 예약해뒀던 이런-저런-그런 모든 걸 하고 돌아온 건 오후 6시. 이때도 충분히, 정말 충분히 피곤했었다. 밤 10시쯤엔 통화를 하다가 전남편과 싸웠다. 통화시간 28분. 아아, 정말 신기하기도 하지. 2년의 소송 끝에 이혼까지 끝냈는데. 아직도 싸울 수 있는 관계라는 건, 정말 신기한 것이었다. 말을 끊으려는 나와 말꼬리를 잡는 당신. 어쩜, 이 싸움 스토리는 변하지도 않지. 끝을 내도 끝나지 않는 관계란... 참 아린다. 전화를 끊을 때쯤엔 다짐했었다. 비도 오고, 고생도 했으니, 오늘은 술을 마시자. 마셔야만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밤 11시 30분. 어린이날엔 늦게 자겠다며 버티고 버티던 아이가, 마침내 잠이 들었다.


살금살금 방에서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캄캄한 거실. 망설임도 없이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제끼는 이런 순간엔, 이미 피곤함이 저만치 달아나 있다. 아아- 고생했다 나 자신. 먹자. 고생한 나에게 많고 많은 칼로리를 선사해주자. 내가 이미 몇 달째 다이어트 중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후훗. 살이 좀 빠져야 남들도 눈치를 챌 텐데. 이런 생활에 살이 빠질 리가 있나. 잠시 주춤. 참아야 하나. 이 몸뚱이는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고민은 언제나 짧다. 답은 하나. '오늘같은 날엔 좀 풍성히 먹어줄 필요가 있어.' 

그리고 나는 잊어야만 했다. 그놈의 대화를. 서로를 탓하는 날선 말들을. 부드럽고 부드러운, 풍성한 맥주 거품 안으로 날카로운 것들을 몽땅 집어 넣어 삼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대환장파티가 있는 날엔, 안주도 중요한 법. 언젠가 쟁여뒀던 냉동실의 닭발이 떠올랐다. 이걸 샀던 그때의 나는 앞날을 예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푹푹 쉬며 냉장고 앞에 서 있을 내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 같다. 닭발이라니. 과거의 나는 훌륭한, 아니 완벽한 선택을 한 존재였다. 매콤하고 오도독한 녀석을 오물오물 씹으며 목구멍을 싸아- 맥주로 씻어내리는 기쁨을, 미래의 나를 위해 준비해두다니. 꽤 훌륭한 존재인 게 분명했다. 

꽤 훌륭한 나에겐 확고한 음식의 기준이 있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니뭐니 해도 질감이다. 씹는 맛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개불의 오도독, 곰장어의 꼬드득, 막창의 질겅질겅.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식감. 치아를 자극하는 그런 식감에 나는 환장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중에서 닭발은... 세상에! 오도독과 꼬드득과 질겅이 모두 합쳐진, 지구상의 몇 안되는 위대한 질감을 가진 식재료 중 하나였다. 이 녀석을 불에 구워 불향을 입혀 파는 대한민국이라니. 정말 만만세였다. 맥주와의 조합은, 어우, 말해 뭐해. 이런 조합을 모르는 자와는 친하게 지낼 수 없다!....고 호기롭게 외치고도 싶지만, 나는 사실 알고 있다. 이 맛을 사랑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심지어 이렇게나 침을 질질 흘리며 극찬하는 사람은, 일단 내 주변엔 나 하나뿐이라는 걸 40여 년 인생을 살면서 배웠다. 뭐, 아무렴 어때. 


자정이 가까워 오는 깊은 밤. 꽁꽁 언 닭발을 열성적으로 볶았다. 볶으면서 맥주캔을 몇 번을 바라봤는지 남들은 알까. 볶으면서 마시든, 다 볶고 마시든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장담하건데, 디테일은 정말 중요한 것이니까. 

어쨌거나 엄청난 인내심으로 한 상을 차려냈다. 눈이 빡빡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 뿐. 이제 시작이다. 내 눈앞에는 폴폴 김이 나는 빠아아아아아알간 닭발과 파아아아아아란 맥주캔이 놓여있다. 






안주를 먼저 맛볼 것인가. 맥주를 먼저 들이킬 것인가. 이걸 고민한다면 아직 혼술 내공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안주로 젓가락을 뻗는 일 같은 건, 프로 혼술러에겐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안주는 맥주를 도울 뿐. 1순위가 되어서도, 먼저 입 안을 어지럽혀서도 안되는 법.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작이 가장 중요하다. 왼손으로 캔을 잡고, 오른손으로 탁, 캔을 딴다. 칙- 소리와 함께 맥주가 머금고 있던 숨결을 후-하고 내게 불어주면, 맥주의 숨결을 코로 깊이 빨아들여본다. 그대로 잠시 녀석을 지그시 바라본다. 서로에게 첫인상은 중요한 거니까. 그렇게 눈인사를 나눈 후, 그대로 캔을 들어 입으로 가져다대고 꿀꺽- 꿀꺽- 꾸우우우우울꺽. 연거푸 세 번 크게 들이마신다. 알싸한 알코올과 탄산이 목젖을 치며 넘어가고, 꾸우우우우울꺽과 함께 참았던 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맥주의 숨결과 내 숨이 하나로 뒤섞여 입밖으로 뱉어지는 소리. 

"캬-."


그제야 새삼 깨닫는다. 닭발에 정신이 팔려 인지하지 못했었지만, 나는 목이 말랐던 거였다. 물로는 채워지지 않는, 2% 부족한 이 갈증. 2%라는 이름을 가진 그 분홍껍질 음료는 아무리 마셔도 단내만 날 뿐, 이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없다. 이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알코올. 촉촉히 목구멍을 적시고 나면 갈증이 사라진다. 천천히 숨을 쉬어본다. 이제야 몸이 제 리듬을 찾아간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들 맥주 날 숨. 들 맥주 날 숨. 정겨운 박자에 몸을 맡기고, 오랜만에 느끼는 리듬을 즐겨본다. 찌릿찌릿. 몸끝까지 퍼져가는 알코올. 


이번 책은, 첫 책보다 꽤 고생을 한 것 같아. 시간에 좇겼지. 회사에서 원고를 볼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아이를 재운 후 퇴고퇴고퇴고를 하느라 잠도 꽤 부족했어. 시간이 많았다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글이 더 좋았다면 더 많이 팔렸을까? 잠까지 줄여가며 실핏줄까지 터져가며, 나는 왜 그런 고생을 했을까. 어쩌면 능력이 없는 건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야, 능력 부족은 충분히 알지. 그냥 즐거워서, 그래서, 즐겼던 것 뿐이잖아. 아무런 반응도 없는 이런 글을, 나 하나 즐겁자고 계속 써대는 게 맞나? 맞든 틀리든 계속 쓰고 싶잖아. 근데 뭘 써야하지? 또 무엇을 엮어볼 수 있을까. 

전남편이 책을 읽는다면? 이제야 말이지만, 그 반응이 정말 두려워었다. 지금의 평화가 깨어질까봐. 습습후후- 숨을 다지며 두려움을 이겨내려 용을 썼던 많은 밤들. 그렇게나 마음 졸이면서도 계속 했던 건, 이 시간이 과거를 이겨내는 과정이라 생각했었기 때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분명. 하지만 역시, 그런 걱정같은 건, 책이 잘 팔린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배웠......... 스톱. 

이봐, 이러지마. 이 귀한 혼술의 시간에 삭막한 현실을 떠올리다니. 거 참, 무례한 녀석이네. 


다시 한 번 숨을 내쉬고, 캔을 잡아 올려서 꿀꺽- 꿀꺽- 꾸우우우우울꺽. 알코올의 힘으로 현실을 눌러버린다. 술을 마시며 걱정을 붙잡고 있는 건 프로 혼술러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 현실을 잊으려 돈을 쓰고 알코올을 사는 건데, 이 혼술의 시간에 현실을 끌어오는 건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다. TV를 켠다. 채널을 마구잡이로 돌리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손가락을 멈춘다. 화면 속 그들이 신나게 웃으면, 나도 따라 웃는다. 아마 저들도 어딘가는 슬프겠지. 그럼에도 웃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도 깔깔깔. 기분이 안 좋을 때 웃어도 엔돌핀이 돈다잖아. 나는 지금 시간낭비를 하는 게 아니라, 귀한 엔돌핀을 생성하는 중.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지. 그렇다면 자, 다시 한 번 꿀꺽- 꿀꺽- 꾸우우우우울꺽. 






즐거웠었다. 어젯밤은. 시작이 어쨌든, 한 두번 쯤은 웃다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 자, 오늘은 토요일. 금요일에 마셨으니 토요일에도 마시면.... 물론 그래도 되겠지만, 한 올 남은 이성이 그런 나를 말린다. 이성이 내게 말했다. 

"뭐라도 써. 그리고 그냥 자."

이성이 시키는 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어젯밤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거리면서도 글을 마쳤다. 무려 토요일 밤의 목마름을 참아내는 나는, 꽤 훌륭한 혼술러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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