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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May 26. 2023

친구

그날 밤. 우리는 불나방같았다. 오랜만에, 정말 아주 오랜만에 옛 친구들이 모인 밤. 심지어 아이들을 다 집에 두고 우리끼리만 모인 그런 밤이었다. 이런 자리, 얼마만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발이 아플 줄 뻔히 알면서도 야심차게 높은 구두를 꺼내어 신고, 잔뜩 신이 나 밤거리로 나섰다. 시작은? 일단 밥이었다. 옛날 한때를 떠올리며 깔깔거리며 우리는 고기를 구웠다.

“이게 진짜 얼마만이야.”

“걔 소식 들었어?" 

"누구누구?”

추억의 이름들을 하나씩 소환하며, 헐 대박! 같은 감탄사를 쏟아내며 한참을 웃었다. 나름 유명한 가게였지만, 고기맛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폭포수가 터진 듯 이어지는 대화에, 추임새처럼 입으로 고기를 실어날랐을 뿐. 입에 들어온 게 고기가 아니라해도, 어쩌면 아무도 몰랐을지도 모를 그런 분위기였다.


"2차 가자!!" 외치며 나선 길.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도 루프탑 바 같은 데 한 번 가볼까?"

눈부신 5월이었다. 살랑살랑 밤바람이 부는 호숫가. 루프탑 바에 앉아 이 바람을 맞으면, 추억 한 페이지가 아름답게 반짝일 것만 같은 그런 밤이었다. 지나간 젊은 날들이 추억으로 불리듯,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기억 또한 추억으로 남겠지. 우리는 의기투합해 길을 따라 걸었다. 한 명은 핸드폰으로 주변 루프탑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둘은 두리번 두리번 건물의 옥상들을 살폈다.

"야, 저기, 저기 봐."

"오~~~~ 가보자 가보자!!!"

루프탑 바들은, 오징어배에나 달아둘 법한 큼지막한 전구들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자태를 뽐냈고, 주렁주렁 걸린 불빛이 보이면 우리는 그곳으로 돌진했다. 캄캄한 밤거리를, 불빛만 보며 헤매었다.


하나-, 둘-, 셋.

모든 오징어배들이 만선이었다. 루프탑바는 곳곳에 있었지만, 세상에, 빈 자리가 정말 하나도 없었다. 토요일 밤이었고, 핫한 지역이었고, 손님이 가장 많을 시간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건 좀 너무 하다 싶게 자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밤거리에 서 본 세 사람은, 만선의 루프탑 바들이 당황스러웠다. 이 동네 모든 사람의 목적지가 루프탑이었던 걸까.


넷- 다섯-.

다섯 손가락이 넘어가니 더이상 세기도 힘들었다. 어, 어쩌지. 어디 가지. 루프탑 바가 아니라도, 반짝반짝 조명이 아름다운 곳들엔 모두 사람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다. 불빛을 좇아다녀서인지 온동네가 밤바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캄캄한 바다. 샤랄랄라 불빛. 사람들은 파도가 되어 무리를 지어 그 사이를 흘렀고, 우린 불빛만 바라보며 그 동네를 뱅뱅뱅뱅 돌았다.

입에 넣었던 건 분명 고기였던 것 같지만, 이젠 슬슬 배가 고파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파도가 되어 밤바다에서 사라져버릴 수는 없는 일. 메인 거리를 벗어나 조금 한적한 도로까지 나가 1층 맥주집에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털썩-. 이미 우리는 조금 지쳐있었다. 20대였다면, 이 정도로 이렇게나 지쳐버리지는 않았겠지. 우리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체력과 에너지를 절감하며 잠시 충전모드에 돌입했다.


그리고 다시 짠-. 

맥주 투여로 갈증이 해소되고 나초가 나트륨을 공급해주니, 수다에너지는 다시 차올랐다.

"야, 여기 바람도 불고 밖으로 호수도 보여. 루프탑 같네."

"이거 진짜 맛있다. 안 왔으면 후회할 뻔."

세월이 우리의 에너지를 조금 앗아가긴 했지만, 현명함 한 스푼을 더해준 듯도 했다. 아무도 더이상 루프탑 바를 언급하지 않았다. 못 가진 것에 연연해서 무엇하리. 그저 현재,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사실, 우리는 느끼고 있었다. 이곳이 루프탑이든 지하 2000m 땅굴 속이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것을.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고, 지나간 각자의 시간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로 이 밤을 가득가득 채워갈텐데, 그곳이 어디든 뭣이 중할까. 그저, 귀를 열어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삶과 삶과 삶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흘렀다. 장소를 옮겨서 해가 뜰 때까지, 정말 수다만으로 밤을 꼴딱 채웠다. 우린 모두, 각자 삶의 무게를 짊어지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매일 만나던 그 시절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우리 삶엔 펼쳐졌고, 우리는 그저 묵묵히 그 일들을 감당해내며 살고 있었다. 도망치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다 마주 앉은 우리들. 

어쩜, 이렇게 잘 버텨줬니. 애썼다. 많이 힘들었겠다. 연락하지! 우리 이제 자주 좀 만나자. 너무 뜸했어.

여러 번, 여러 번, 이런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우린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는 이제 꽤나 멀어져,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려울 수 있음을. 3개월 후? 그쯤엔 또 한 번 모이게 될까? 안 만나는 동안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며 이야깃거리들을 쌓아가다, 언젠가 또 마주하게 되는 날 밤을 새워 서로의 삶을 나누게 되겠지. 생생함은 다소 줄어든 '요약본' 이야기일지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됨을 우리는 함께 느꼈다. 





그런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 멍하게 사무실에 앉아 지나간 주말을 떠올렸다. 아아, 또 언제쯤 그런 밤을 보낼 수 있을까. 웃음과 격려와 대화가 넘치는 그런 밤을, 또 언제 맞을 수 있는 걸까. 

문득 떠오른 건, '나이 먹으면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는 옛말. 대체 왜 그런 걸까. 옛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보다, 매일 만나는 사람과 친한 사이가 되어 버리면 더 자주 힘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회사와 집을 오가는 이 일상에서 '찐친'을 사귀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주변을 둘러봤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무려 15년을 이곳에서 부대꼈으니 다들 어느 정도의 친분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옛 친구들만큼 수다 레벨을 쌓은 이는 없었다. 이렇게나 서로 친한데, 또렷이 존재하는 거리감이란. 고요히 자리에 앉아 업무에 열중해 있는 동료들을 보고 있자니, 이 거리감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세상에. 이들 모두의 삶이, 너무 바빴다. 업무시간엔 각자의 일을 해야 했고, 일을 마친 후엔 보금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일상. 한 공간에 오래 머물고 있지만, 함께 나눌 물리적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이. 그러니, 적당히 거리가 있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집이라는 공간에도 역시,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는 없었다. 친구같은 엄마를 목표로 고군분투하고는 있지만, 11세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서 완벽한 티키타카는 어려웠다. 화자와 청자가 또렷이 나뉘어져 있는 관계랄까. 아이는 본인의 생활을 얘기하는 데 진심을 다했다. 내 반응이 어떻든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게임이든 학교생활이든 일단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펼쳐냈고, 들어주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나면 밤이 찾아왔다. 나이는 먹었고 친구도 별로 없는 자가 홀로 맞이한 밤. 

밤은 휴식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날 것의 욕망이 끓어오르는 시간이기도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면 또렷하게 떠오르는 욕구 한 덩이를 마주한다. 

"말이 하고 싶어!!!"

이렇게 잠들면..... 입에... 곰팡이가.... 필 것 같아.........  스스로를 수다쟁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건만, 요즘은 쉽게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아아, 말이 하고 싶어!! 대화를 하고 싶다아아아아아아!! 


"요즘 김윤아 노래 들으면서 힘을 낸다? 듣고 있으면 힘이 나. 애 키워놓고 나이가 더 들어서도 감성을 유지하며 일을 할 수 있구나. 존경과 공감을 담아 노래를 듣게 돼. 지금의 감성이라도 지키며 나이먹고 싶다는 다짐도 하고."


"어제는 길을 가다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먹고 싶었거든. 맙소사. 현금이 하나도 없는거야. 근데 자판기에 붙어있는 카드리더기가 보이더라고. 아아, 세상이 좋아져서 카드로 자판기를 이용할 수 있구나 싶어 기뻤지. 카드를 꺼내서 여기저기 찔러넣어보고 대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자판기가 반응을 안 해. 그때 뒤에서 어떤 분이 다가와서 여기다 카드 꽂으면 된다고 알려주시는 거야. 헐, 나보다 한 30살은 많아 보이는 백발의 할아버지셨는데, 엄청 친절하셨어."


이런 천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싶다는 이상한 바람. 누군가의 말처럼 무용한 것들이 쌓여야 친분이 되는 것일까. 무용한 것들을 쌓을 시간이 부족한 어른들은, 바쁘기 때문에 서로 친해지기도 어려운 걸까. 시덥잖게 깔깔거릴 일상의 친구를 바라는 건, 이 어른의 세계에 나 하나 뿐인 걸까. 들을 사람도 없는 소소한 말들이 마음에 쌓여가는 기분이다. 마구마구 뱉어버리고 싶지만, 뱉을 상대도 시간도 없다는 게 문제겠지. 


친구들과 함께 거닐었던 밤거리가 떠오른다. 늦은 밤, 불빛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더랬다. 그 늦은 시각까지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 그 이유가 대체 뭘까.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이들에게 '수다 욕구'라 이름 붙일 만한 이런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이 기묘한 헛헛함을 풀어내기 위해, 둘-셋- 끼리끼리 사람들은 모여 앉아, 불나방들처럼 불빛 아래 옹기종기, 저마다 각자의 허기를 토해놓고, 그걸 서로 나눠먹으며 어떻게든 살아가려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너무 좋은 친구들을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서 그 빈자리가 크게 남아버린 것 같다. 여운이, 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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