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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Sep 23. 2023

내 생애 가장 '비싼' 지름신

'내가 대체 왜 그랬지?'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올 때가 있다. 내가 큰 일을 저질렀음을 깨닫는 순간. 너무 큰 후폭풍이 뻔히 보이는 데도 감정에 취해 이성이 '마비'되는 순간. 인생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내 경우엔 가끔씩 이런 일을 저지르곤 했다. 누군가 나를 붙잡고 꼬치꼬치 이유를 묻는다면 행동 당시에 떠올렸던 백만스물두가지 이유쯤은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이유는 역시나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인 것 같다. 

자, 일은 벌어졌고 그 다음엔? 스스로가 저지른 일을 감당하며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미친 걸까',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고민해봤자 시간 낭비. 시간을 되돌리는 기술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는 것 뿐. '어제의 내가 사고를 쳤구나. 후훗.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감당을 해줘야지' 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차를 사면 되잖아?'하는 생각을 한 건, 남편과 이혼소송을 시작하면서였다. 코로나 초기여서 세상은 흉흉(?)했고, 택시나 버스 등 대중교통에서의 감염에 대해서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당시 8살이었던 아이와 꼼짝 않고 집에만 들어앉아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날들을 집에서 보냈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외출할 일이 생겼다. 지인이라도 만나려면 나가야 했고, 그럴 때면 차편이 필요했다. 

별거 중이었던 남편은 이런 시국에 아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거면, 부담없이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정도는 할 수 있고, 아이의 감염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도 말을 했었다. 아주,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연락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식의 만남이 편한 사이일 리가 없었다. 별거에 이어 이혼소송까지 시작한 관계였으니까. 그와 마주하는 것이 불편했다. 코로나 시국이 이어지면서 대중교통에서의 감염률이 낮다거나 하는 식의 확신에 찬 뉴스들이 나왔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불안이 온 세상을 집어삼킨 듯한 분위기랄까. '만약에', '혹시나'... 나 역시 불안에 잔뜩 찌들어 있는 상태였다. 

나 하나 마음 편하려고 아이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게 맞나, 아이가 지하철을 탔다는 이야기를 남편한테 하면 분명히 화를 낼 텐데 어쩌나, 내가 불편함을 참으면 아이도 편안하고 안전한 거 아닌가. 

외출을 결정하면 이 모든 고민이 한 번에 몰려왔다. 갈팡질팡. 그러던 어느날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이 바로 '차를 사서, 내가 운전을 하면 되는 거잖아?'였다. 대중교통도 불안하고 남편의 차도 불편하니, "에라이 내가 차를 사자!"하는 결론을 내버린 것이었다. 


차에 대해 아는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경차와 중형차가 어떻게 나뉘는지, 엔진이 어떻고, 경비가 저떻고, 차종도 전혀 몰랐다. 새로 나온 차에 대해 누군가 말을 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신형인지 구형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나와 '무관한' 세계의 이야기였고, 관심을 가질 그 어떤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차에 대해 구분하는 나름의 기준은 있었다. 어렸을 때 가졌던 기준을 이 나이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꽤 소신있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세상에서 차는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됐다. 세 가지 인상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도 같다. 사납게 생긴 애, 평범한 애, 착하게 생긴 애. 내 눈에 헤드라이트는 사람의 눈모양처럼 보였고, 본네트와 번호판이 있는 차 앞부분은 코와 인중처럼 여겨졌다. 아아.. 설명하기엔 너무 부끄럽지만, 어쨌든 그랬다. 생전 처음 보는 차를 마주하면 누가 묻지 않아도 첫인상을 평가했다. 예를 들면 "와, 쟤는 진짜 성격 더럽게 생겼다"하는 식이랄까. 차종이 뭔지, 어느 회사 차인지는 여러 번 들어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차를 살까'하는 생각을 떠올린 건 확실히 무모했다. 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오빠는, 본인 친구가 운영하는 중고차 매장에 함께 가보자고 권유해 왔다. 돌아보면, 이과형 인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봤자 "착하게 생겼네", "사납게 생겼네" 따위의 말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내 상태를. 그러니 본인의 피곤함을 줄이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내 혈육은, 무지한 동생의 문제를 친구에게 떠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되지? 일단 가서 보자."

오빠의 말에 긍정의 대답을 하고 약속을 잡았다. 오빠의 말투 또한 '근처에 식당 생겼던데 가볼래?' 정도의 느낌이었기에, 일단 가서 먹어보자(?)하는 마음으로 중고차 매장에 들어섰다. 간단히 말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의미다. 

가장 싼 소형차를 사고 싶다는 내 말에, 오빠 친구는 저렴한 차 몇 대를 보여줬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알못(차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인 내가 봐도 아주 예전에 나온 차라는 걸 알 수 있는 정도의 그런 모델이었다. 차의 인상도 세상만사 매우 피곤에 쩔어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가격대를 좀 더 올리면 어떤 차들이 있나요?"

이 말을 여러 번했다. 첫 차에 대한 로망같은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이 눈에 너무 '하찮게 보일 만한' 차는 절대로 사고 싶지 않았다. 이혼이라는 상황에 대한 자격지심이었을까. 아이에게 차를 보여주며 "짠! 엄마차 샀다! 이제 아빠차 말고 엄마차도 탈 수 있어" 말하고 싶었다. 

지금 돌아보면 몇 개의 후보군이라도 뽑아가는 것이 옳았다. 크기는 어느 정도, 가격의 상한선은 어디까지. 그 정도 기준만 정해놔도 내 선택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을 텐데, 내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차를 가지는 데 대한 설렘이나 기대감? 그런 게 도무지 생기질 않았다.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여겨졌달까. 시무룩하게 이 차, 저 차를 옮겨 다니며 구경을 했다. 오빠 친구는 정말 친절하게 운전석의 구조라거나 차의 장단점에 대해 설명했지만, 내 눈엔 그저 다 비슷하게만 보였다.





결국 고른 건, 구형 말리부였다. 이유는? 그 차를 볼 때쯤, 내가 완전히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비슷한 녀석들의 운전석에 앉았다 내렸다를 여러 번 반복했지만, 이놈이 그놈 같고 저놈이 또 이놈 같아 보여서 도무지 하나를 결정할 수 없었다. 오빠와 오빠 친구는 내 의사를 물었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차는 운전석이 넓게 빠졌어요" 오빠 친구가 말하면 "아, 그렇군요"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떡해야 하지' 고민하던 그 무렵 만난 것이 말리부였고, 친구의 설명을 경청만 하던 오빠가 "말리부, 괜찮지"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이어지는 오빠의 말. "말리부 튼튼하잖아." 뒤로는 분명 말이 더 이어졌지만, 딱히 이해하진 못했던 것 같다. 웬만큼 괜찮아 보이는 소형차와 가격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정을 합시다! 탕탕! '드디어 내 차가 생겼어!' 보다는 이 많고 많은 차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그저 기뻤다. 


온전한 요즘의 정신으로 돌아보면, 이 당시에 무언가를 결정하는 건 미친 짓에 가까웠다. 이혼소송을 시작한 직후였고, 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때였고, 코로나로 아이 양육을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였으며, 공황장애와 비슷한 증상이 와서 육아휴직을 낸 지 몇 주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들숨날숨을 지켜내며 집에서 쉬는 게 옳았을 시기. 

하지만 온전한 요즘의 정신으로 다시 생각해봐도, 이때 홀린 듯 지름신의 강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절대로 차를 사지 못했으리라. 평소의 나였다면, 몇 없는 지인들에게 수차례 질문을 던지고 인터넷을 헤매며 온갖 정보들을 모으고 다시 그 정보들을 검증하고 정리했을 게 뻔했다. 이 큰 돈을 쓰는데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겠다는 욕심을 부렸을 테고, 그 과정 어딘가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을 것 같다. 두 달 전에 고장난 에어프라이어를 새로 사려 얼마나 알아봤던가. 모양, 용량, 가격, 전력, 소음 등 수많은 조건들을 따지고 따지다가 여태 결정을 못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장애가 이어지는 이 상태를 '오, 이번 달 생활비 아꼈다'고 생각해버리는 엄청난 합리화도 갖추고 있는 것이 나의 원래 모습이었다. 무엇이 가장 합리적일지, 어떤 선택이 최상일지, 최고의 가성비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지, 고민과 고민과 고민이 가득한 고민의 늪에 빠져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을 내 모습이 너무 뻔하게 보인다. 


미친 상태여서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미친 상태로 무언가를 질러버리는 무모함이 때로는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던 owner driver가 되어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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