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의 근황 토크 타임. 이런 안부 전화에선 일상 중 기억에 남는 일들을 전하기 마련이다. 마트에서 계란이나 우유를 샀다는 식의 흔한 일을 대화 소재로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많고 많은 물건 중 차와 같은 '엄청난' 소비는 화제로 꺼내게 된다.
"아! 나 차 샀다?"
이런 식으로 이어진 몇몇 대화를 통해, 차를 샀다는 이야기를 하면 99.9% 사람들이 "무슨 차?"라고 묻는다는 걸 알게 됐다. 차종에 대한 질문이리라. 내 차는 말리부였지만, 이 낯선 대명사가 입으로 출력되는 데에는 늘 시간이 걸리곤 했었다. 말...말...까지 떠올리며 "쉐보레에서 나온 건데"라고 말을 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말..... 말...."
"말?"
"응, 말... 뭐였거든? 말보로? 아! 말리부!"
누군가는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본인이 결제한 차종을 모른다고?... 나도 의아하지만, 나는 그랬다. 이 대화를 여러 사람과 반복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했었다. 내 뇌엔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돌아보면, 이런저런 대명사들이 머리에서 뒤죽박죽 섞여서 출력되는 일이 잦았다. 예를 들면, TV를 보다가 '어? 저 사람 스누피에 나오는 악당 닮았다!'라고 혼자 생각을 하는 상황. '그 악당 이름이 뭐였더라?' 궁금해하다가, 결국 검색을 시작하고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스누피는 하얀 강아지였다는 것을. 악당이 나오는 만화는 파란 스머프였고, 악당 이름은 가가멜이었다. 스누피든 스머프든 어쨌든 내게는 비슷한 느낌의 단어였고, 말리부 또한 내 뇌에선 말보로와 비슷한 느낌의 단어로 받아들인 듯했다.
"말... 뭐더라"를 시작하면서 입으로 "말보로"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그 다음 단어로 "말리부!"가 출력됐다. 아무튼 내 차는 말보로... 아니, 말리부였다.
이후 이어지는 질문도 사람마다 비슷했다. "중고? 새 차?" 혹은 “말리부가 몇 cc야?”였다.
중고인지를 물으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cc라는 낯선 용어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몰라"라고 답을 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지금은 안다. 이것이 배기량을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배기량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또 당당하게 답할 수밖에. "몰라요."....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어쨌든, 자동차라는 물건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차에 대해 사람들이 아는 게 정말 많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나는 도로 위에 잔뜩 깔린, 저 굴러다니는 거대한 물체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를 인지했고, 그때마다 현타가 오곤 했다. 이런 주제임에도 덜컥 차를 샀구나...
내가 알든 모르든, 차는 약속한 날짜에 나를 찾아왔다. 차 배송이 온다고 하던 날, 그날도 그저 담담했었다. 일단 차를 받고, 운전연수를 신청해야겠다는 식의 계획을 세웠을 뿐. 약속한 오전 11시, 전화가 울렸다.
"차 도착했는데요."
"아, 내려갈게요!"
며칠 전에 봤지만 정말 초면인 듯한 하얀 말보로... 아니, 말리부가 서 있었다. 차를 몰고 오신 분은 꼼꼼히 차를 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무엇을 봐야 할지도 몰랐다. 차가 멀쩡하니까 여기까지 무탈히 끌고 오셨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딱히 살펴봐야 할 이유도 없는 듯했다.
이런 순간엔 옆에 다른 어른이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어른'을 찾기엔 이미 나도 어른이었지만, 잘 모르는 일을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엔 나보다는 이 상황을 좀 더 잘 아는 누군가가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이런 상황에 나보다 더 무지하실 것 같고(부를 방법도 없었다), 이 세상에 있는 남편은 소송 중이니 부를 만한 대상은 아닌 것 같고. 나도 모르게 '남자 어른'을 찾고 있음을 깨닫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아직도 여전히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달까.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그렇게나 여러 번 다짐해 놓고, 고작 이런 상황에서 기댈 만한 누군가를 찾고 있다니. 이 정도 일은 혼자 감당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 나는 마흔도 넘은 어른이 되어버렸으니까.
매우 어른스러운 자세로 배송 오신 분께 인사를 드렸다. 이 정도 상황, 후훗, 익숙하죠, 혼자 할 수 있죠, 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달까. 하지만 그분이 몸을 돌리시는 순간 큰 문제 하나를 발견했다. 어라, 차를 여기에 세워두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분이 차를 세워두신 곳은 빌라 주차장의 가장 앞쪽, 다시 말해 차를 빼기 가장 쉬운 곳이었다. 뒷공간은 텅 비어있는 상태. 내가 사는 빌라는 앞뒤로 2대씩 차를 대야 하는 구조였는데, 주차 자리가 부족한 상황에 뒷공간을 이렇게나 차지해 버리면 민폐인 게 확실해 보였다. 연수를 언제 시작할지도 모르는 상황. 며칠이나 차를 저렇게나 잘 보이는 곳에 두면 누군가가 차를 뒤로 옮기라고 말하지 않을까? 지금의 자리에서 그대로 후진만 하면 될 일로 보였지만, 무사고 20년 경력의 나는 후진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잠시만요!!"
떠나려는 분을 붙잡고 차를 뒤로 좀 옮겨달라 부탁드렸다. 어른스러움은 개뿔. 매우 죄송한 얼굴로 "제.. 제가 시동도 걸 줄 몰라서요"를 설명하고서야 그분은 납득한 듯 차를 옮겨주셨다. 남의 주차를 그렇게나 열심히 본 건 처음이었는데, 와우, 그건 마치 '파킹 쇼' 같은 느낌이었다. 덩치 큰 녀석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후진을 대각선으로 해서, 가장 구석 벽으로 바싹 붙은 후 바로 딱 정지를 했다. 앞으로 다시 움직인다거나 하지도 않고,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는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저 거대한 것을 어떻게 저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걸까. 와- 하며 박수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상대가 놀랄까 봐 정말 겨우 참아냈다.
그대로 집으로 올라오기엔 아쉬웠다. 그래도 처음 만난 사이인데 인사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아까 배운 대로, 리모컨을 삑 눌러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살포시 엉덩이를 갖다 댔다. 차키를 꽂는 자리가 눈에 들어왔지만 꽂지 않기로 했다. 만약에 혹시나 거짓말처럼 시동이 걸려 버리면, 그래서 앞으로 움직여 버리면, 그다음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오른발에 닿는 두 개의 페달. 분명 하나는 액셀이고 하나는 브레이크겠지. 오른쪽이.. 브레이크였나? 왼쪽?? ... 20년 전 배운 게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운전석 쪽에 있는 수많은 버튼들도 '구경'했다. 나는 이 나이까지 몇 대의 차를 타봤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꽤 많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이 버튼들을 눈 여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운전자들은 운전을 하면서 "추워? 더워?" 물어보고, 이걸 삭삭 조작해 히터도 켜고 에어컨도 켜고 음악도 듣던데, 그게 얼마나 엄청난 능력인지를 새삼 느꼈다. 이 많고 많은 녀석들의 기능을 다 알아야 그런 조작이 가능하구나. 나를 태워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 것임을 깨달았다. 하릴없이 차 구석구석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서서히 실감했던 것 같다. 여긴 우리 집 주차장. 내가 있는 이곳은 내 차 안. 내가 진짜 차를 샀구나, 이게 내 차구나, 하는 현실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선명히 남아 있는 기억 하나. 운전석 왼쪽의 버튼을 눌렀더니 운전석이 움직였었다. 앞쪽으로 당기면 운전석이 앞쪽으로, 뒤쪽으로 밀면 운전석이 뒤로 움직였다. 이 당연한 움직임이, 당시의 내게는 진심으로 신기하게 다가왔었다. 오, 내가 운전석을 조정하고 있어. 눈앞에 핸들이 있잖아?
앞뒤로 운전석을 타고 놀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하고 감탄사를 뱉었더랬다. 텅 빈 공간에 울리는 내 목소리. 그 기묘한 울림을 들으며 '내 공간'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었다. 집이나 건물에서의 울림과는 완전히 다른, 좁고 낮은 공간만의 울림이랄까.
이건 내 차. 여긴 내 공간. 천천히 핸들을 쓰다듬어 봤다. 이 차를 타고 어디까지 가볼 수 있을까? 잘할 수 있겠지? 와.. 진짜 잘할 수 있을까?... 나란 인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