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누가 내게 그런 충고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차에 정을 붙이기 어려울 때는 이름을 지어 불러주라고, 누군가가 말을 했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절로 생각나는 상황.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차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내 차'가 되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피식 웃었다. '차가 무슨 생명체도 아니고 이름은 무슨. 그런 유치한 일을 왜 해'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루이틀 운전하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차에게 말을 걸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잦아졌다. 차에 있으면 쓸데없이 혼잣말이 많아졌다. 초반엔 "어우~ 너무했다" 정도였는데, 그 다음엔 "와, 브레이크 잘 밟았네"하며 나를 향해 말을 했다가, 어느 날부터는 "주차장에서 주말 잘 보냈어?" 정도의 인사를 차에게 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엔진이 부릉부릉 소리를 소리를 내면 "왜, 막 달려버리고 싶어?" 같은 대화를 아주 자연스레 건넸다. ......나만 그런건가 정말?
호칭 없이 허공을 향해 말을 건네는 날들이 쌓여가면서 "야"하고도 불렀다가, 좀 지나선 아주 자연스럽게 "말리야"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외로움이 이렇게나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어쨌거나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내 차의 이름은 '말리'가 되었다. 말리부의 앞자만 따서 이름을 지은 건 좀 너무했다 싶지만, 말리야, 이름을 가진 차도 분명 흔치는 않을 거야 만족하렴, 하고 생각해버렸다.
'월드컵 경기장 다녀오기' 미션도 자주 하다보니 익숙해져 갔다. 울지도 않고 대리운전을 찾지도 않으며 왕복을 무탈하게 해내던 무렵, 이제 슬슬 3대 과제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3대 과제라 함은, 운전에 익숙해지면 도전해보고 싶었던 나름의 목표였다.
주유와 드라이브 스루(맥도날드 혹은 스타벅스), 그리고 자동 세차.
주유는 후훗, 사실 너무 싱겁게 성공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집이 있는 골목에서 대로로 나와 300m 쯤 가면 바로 S-oil 주유소가 있었다. 엄청난 공부 끝에 주유할인이 되는 카드를 발급받고, 지정 주유소를 S-oil로 선택한 후 날을 잡아 방문했었다. 주유구가 조수석 쪽에 있으니 이 방향으로 가면 되겠지, 차를 스윽 밀고 들어갔더니 직원분이 나오셨고 직원분의 손짓에 따라 직진 후 멈춤. 그리고 수없이 상상했던 대로 "5만 원 치요"를 떨지 않고 말했다. 가뿐히 성공! 주유소는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물론, 길을 가다 자연스럽게 주유소로 진입해 주유를 하는 일 같은 건 아직 해본 적이 없다. 길에서 허둥대며 주유소를 찾는 끔찍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미리 기름을 꽉꽉 채워다녔다. 집앞 주유소에 한정된 성공이긴 했지만, 어쨌든 주유는 패스.
다음 미션은 드라이브 스루였다. 생각을 해야 했다. 언제 가야 사람이 가장 적을까. 고심 끝에 오후 4시를 선택해 월드컵 경기장 가는 길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오전엔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많을 테고, 점심식사 이후에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오후 4시면 커피를 마시기엔 애매하지 않나'하는 것이 내 상상이었지만, 역시 상상은 상상일 뿐.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엔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오래 기다리긴 했지만, 차들이 있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앞차를 흉내내면 됐으니까.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미리 연습한 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를 외쳤고, 결제까지 성공. 빨대를 꽂아 쫍쫍 빨며 한 손을 핸들 위에 척 올린 나는, 내가 봐도 좀 멋있는 것 같았다. 이런 어메이징 드라이버 같으니!
이젠 가장 고난도로 보이는 자동세차만 남은 상황. 차를 받은 지 벌써 여러 달이 흘렀지만, 용기가 부족해 세차장을 간 적이 없었다. 온갖 세차용품들도 찾아만 보다가 '자동세차 할 거면 필요없지 않나?' 생각하고 단 하나도 사지 않은 채였다. 세상 먼지를 다 뒤집어 쓴 차의 몰골을 보고 있자니,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출발 전엔 다정하게 말도 걸었다. "말리야, 오늘 드디어 목욕하는 거야. 할 수 있겠지?"
주유를 하며 미리 점찍어 둔 S-oil 내의 자동세차장을 향해 다가갔다. 걱정과 달리 매우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직원분이 앞에서 바퀴를 보며 손을 돌리면 그 모양 그대로 핸들을 돌렸고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면 정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퍼포먼스였다. 정지 후엔 창가로 다가오셔서 "기어를 N으로 바꾸세요" 알려주셨고, "와이퍼 끄세요"도 말씀해주셨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였는데 이걸 그렇게나 두려워했다니. 자주 와야겠다는 다짐도 할 만큼, 정말 쉬웠다.
액체같은 것이 뿌려졌고, 세차기 안의 솔들이 사방에서 나와 차를 문질렀다. 몇 달간 쌓인 먼지가 하얀 거품을 까맣게 만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와우- 보는 내가 다 개운한 느낌. 그리고 물이 뿌려졌고, 까만 거품들이 사라짐과 함께 물기를 닦는 솔이 차 위를 훑고 지나갔다. 끝난 건가? 차를 빼야 하나? 아무런 신호가 없어서 망설이던 그때, 사방을 둘러보던 내 눈에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차가 보였다. 어엇, 내가 차를 빨리 빼줘야 뒤차가 덜 기다리겠구나. 그렇다면 눈치 빠른 내가 차를 빼줘야지! 의기양양하게 물기가 남은 상태 그대로 스윽 전진해 자동 세차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직원분이 뛰어와 차 트렁크 위를 다급하게 텅텅- 두드렸다. 뭐지, 뭐가 잘못됐나? 차를 세우고 직원분을 바라보자, 직원분이 물었다.
"바쁘세요?"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걸까. 육아휴직자인 게 티가 나나? 바쁠 일은 전혀 없었다.
"아니오...?"
"왜 드라이를 안하고 그냥 나오셨어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헤어드라이기였다. 헤어드라이.... 미용실... 세차장에서 왜 이런 단어가 나오지?
"드라이요?"
해맑게 되묻고 있을 때, 다른 직원분이 걸레를 들고 다가오며 "창문 닫으세요"하고 말씀하셨다. 닫으라니 닫기는 했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직원 두 분이 하나씩 걸레를 들고 트렁크부터 물기를 닦기 시작하셨다. 헉헉대는 숨소리와 함께 나누는 대화는 차 안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왜 드라이 안하고 그냥 나왔대?"
"몰라. 초보잖아."
네, 그렇습니다. 제가.. 무적의 초보입니다. 상황을 보건대, 자동세차기 안에서 큰 솔이 지나가며 물기를 1차로 닦아낸 다음엔 2차로 '드라이'라는 순서가 이어져야 하는 것 같았다. 차를 움직이면서도 물기가 꽤 많이 남는구나 생각하긴 했었다. 원래 이런 건가보다, 그대로 둬도 자연적으로 마르겠지 짐작했었는데, 역시 그런 건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두 분을 고생시킨 건 죄가 맞는 것도 같았다. 자동세차장에서 직원들에게 '수작업 노동'을 하게 만든 민폐 고객은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다.
직원 한 분이 차 윗부분을 두드리며 "가셔도 됩니다" 말씀하셨고, 나는 이때다 싶어 창문을 내리고 인사를 하려 시도했다. 직원분은 운전석 바로 옆에 서 계셨다. 앞창문을 살짝 내리고 "죄송합니다, 세차가 처음이라서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왜인지 뒷좌석 창문을 내리는 버튼을 눌러버렸고, 직원분은 뒷좌석 창문의 갑작스런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다. 당황한 나는 급히 앞 창문을 내리고 "죄송...."을 꺼내려 했지만, "뒤에 차 와요, 가세요"하는 직원분의 말이 더 빨랐다. 사과도 제대로 못한 초보는, "어, 아, 네네"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세차장을 빠져나왔다.
세상에. 역시 뭘 잘 모를 땐,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다. 주차장이고 세차장이고 직원이 움직이라고 할 때 움직여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며, 어쨌거나 저쨌거나 3대 도전과제를.. 모두..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