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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Oct 04. 2023

빨강 노랑 초록 그리고

거울의 방. 운전을 하면서 때때로 거울의 방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운전석에서 보이는 거울들이 이렇게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운전을 하기 전엔 정말 몰랐었다. 사이드 미러, 백미러. 

'미러' 즉 거울이라 하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는 용도로만 생각했던 나는, 운전을 하면서 미러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총 3개의 거울을 보며 운전을 하지만, 그 어떤 거울도 운전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는 데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남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존재하는 거울들. 그 거울들을 이용해 끊임없이 남을 바라봐야 하는 운전자. 도로의 흐름을 읽으라는, 숱하게 들었던 그 말은 어쩌면 남의 움직임을 잘 읽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집에서 나와 약속장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20여 분을 무탈하게 움직였다. 내비게이션의 분노에 찬 ‘띠띠띠띠’도 듣지 않았다. 내 차에 달린 아이나비 내비는 ‘경로를 이탈하여 재검색합니다’라고 차분하게 말하기 이전에 ‘띠띠띠띠’하고 경고음을 낸다. 그 경고음이 가끔은 ‘또또또또?'(또야? 또 이래? 또 길을 잘못 들어?)로 들리지만, 그건 순전히 기분 탓일 뿐. 어쨌거나 이번엔 약속시간에도 늦지 않게 도착할 듯했다. 강 같은 평화가 마음에 가득 흐르는 순간. 오늘도 잘 해냈구나. 말리야, 나 이제 좀 잘하는 것 같아. 어깨 으쓱으쓱.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나는 교차로에 서 있었다. 신호를 받고 좌회전만 하면 오늘의 운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문제라면, 내 차 뒤에 서 있는 택시기사님의 심기 정도랄까. 불과 몇 분 전, 앞차를 따라 나 역시 좌회전을 하려는 순간 신호가 노란불로 바뀌었고, 급하게 휙-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나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웠다. 약속시간까지 여유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뒤의 택시기사님은 여유가 없는 상황인 듯했다. 내가 브레이크를 밟자마자 뽱! 뽱! 클랙슨을 울리며 "멈추지 마! 가라고!" 외치기 시작하셨다. 방금 브레이크를 밟은 주제에, 다시 액셀을 밟아 빠르게 움직일 순발력이 내겐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애초에 멈추지도 않았을 터. 내가 그대로 멈춰있자, 택시기사님은 ‘뽜아앙’하며 마지막 화를 내보이셨다. "너 때문에 못 갔잖아"하는 마음이 아주 잘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당연하게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그놈의 노란불.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게 하는 노란불. 순발력 같은 건 없는 입장이었기에 나는 대체로 멈춰 서길 택했고, 나 때문에 함께 멈춰야 하는 뒤차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다. 급한데 앞을 막아 서 버리면 얼마나 답답할까. 어쨌든 뒤차가 화를 내고 있었으므로, 나는 꾸준히 되뇌었다. 

‘신호 바뀌면 빨리 가야지’, ‘신호 바뀌면 바로 출발해야지’ 


그 탓이었을까. 초록으로 신호가 바뀌자마자, 나는 액셀을 와악- 밟으며 빠르게 달려 나가 좌회전을 했다. 좌회전 차선에 있다가 좌회전을 했으니 문제가 없.... 을 리 없었다. ‘신호가 바뀌면’을 되뇌던 나는, 정말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마자 출발했고, 그 초록불은 당연하게도 직진 신호였다. 

내가 왼쪽으로 핸들을 트는 순간, 건너편 차선에서 이쪽을 향해 오던 차들이 미친 듯 뽱! 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건너편 차선도, 내가 있던 차선도 직진을 해야 하는 상황. 갑자기 튀어나와 좌회전을 하는 나 때문에 건너편 차들은 모두 깜짝 놀란 상태였다. 나 역시 깜짝 놀랐다. 5차선을 가득 채운 차들 모두가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순간 판단으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멈추면 또다시 교차로 한중간에 서 있게 되는 거니까. 튀어나간 속도 그대로 좌회전. 그곳엔 횡단보도가 있었다. 횡단보도 보행자들은 초록불에 맞춰 길을 막 건너려던 참이었다. 세상에. 그대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바로 멈추지 못했다. 액셀을 꽉 밟아 달린 속도가 있었던 탓에, 차는 '끼이이익' 하는 굉장한 소리를 내며 횡단보도를 지나친 후 멈췄다. 미친 듯한 좌회전 질주 후 미친 듯한 급 멈춤. 만약 1초라도 길을 빨리 건넌 보행자가 있었다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백미러로 뒤의 횡단보도 상황을 살폈다. 모든 보행자들이 내 차를 보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도 잘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무슨 미친 경우야?’하는 눈빛들. 

미친 짓을 한 스스로가 매우 한심했지만, 그보다 절로 "어우, 다행이다"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느님, 부처님, 세상 모든 신들이여 감사합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의 멍청함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 나를 태우고 있는 이 쇳덩이가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정말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몰려드는 이런 순간엔, 그 자리에서 뿅 하고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지만 몸뚱이는 여전히 차 안에 있는 상태. 그대로 멈춰 서 있을 수도 없었기에 천천히 액셀을 밟아 목적지로 향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미치지 않고서야 직진신호에서 왜 좌회전을 한 거지?' 백 번 천 번 물어봤자 대답은 없었다. 나라는 인간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한문철 님은 '블랙박스'에서 말씀하셨다. 

"신호를 잘 봐야 해요. 신호의 보호를 받는 순간에 움직여야 보호받을 수 있어요."

'신호의 보호'라는 생소한 단어를 천천히 곱씹어 봤다. 단순히 '가세요', '멈추세요'의 의미로 신호등을 봐왔던 나에게, 신호와 보호라는 단어의 연결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신호는 모두가 함께 지키는 '약속'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세계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건 그런 약속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법이나 규칙 등으로 정해둔 약속들을 다함께 지키니, 이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리라. 빨간불에선 멈추고, 초록불에서 움직이는 것도 전세계인이 함께 지켜나가는 약속인 거였다. 그 약속을 함께 지킬 때 이 세계 속의 개개인도 보호되는 것. 그 약속을 와장창 깨버린 나는, 정말, 도로 위의 빌런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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