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방. 운전을 하면서 때때로 거울의 방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운전석에서 보이는 거울들이 이렇게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운전을 하기 전엔 정말 몰랐었다. 사이드 미러, 백미러.
'미러' 즉 거울이라 하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는 용도로만 생각했던 나는, 운전을 하면서 미러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총 3개의 거울을 보며 운전을 하지만, 그 어떤 거울도 운전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는 데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남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존재하는 거울들. 그 거울들을 이용해 끊임없이 남을 바라봐야 하는 운전자. 도로의 흐름을 읽으라는, 숱하게 들었던 그 말은 어쩌면 남의 움직임을 잘 읽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집에서 나와 약속장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20여 분을 무탈하게 움직였다. 내비게이션의 분노에 찬 ‘띠띠띠띠’도 듣지 않았다. 내 차에 달린 아이나비 내비는 ‘경로를 이탈하여 재검색합니다’라고 차분하게 말하기 이전에 ‘띠띠띠띠’하고 경고음을 낸다. 그 경고음이 가끔은 ‘또또또또?'(또야? 또 이래? 또 길을 잘못 들어?)로 들리지만, 그건 순전히 기분 탓일 뿐. 어쨌거나 이번엔 약속시간에도 늦지 않게 도착할 듯했다. 강 같은 평화가 마음에 가득 흐르는 순간. 오늘도 잘 해냈구나. 말리야, 나 이제 좀 잘하는 것 같아. 어깨 으쓱으쓱.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나는 교차로에 서 있었다. 신호를 받고 좌회전만 하면 오늘의 운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문제라면, 내 차 뒤에 서 있는 택시기사님의 심기 정도랄까. 불과 몇 분 전, 앞차를 따라 나 역시 좌회전을 하려는 순간 신호가 노란불로 바뀌었고, 급하게 휙-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나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웠다. 약속시간까지 여유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뒤의 택시기사님은 여유가 없는 상황인 듯했다. 내가 브레이크를 밟자마자 뽱! 뽱! 클랙슨을 울리며 "멈추지 마! 가라고!" 외치기 시작하셨다. 방금 브레이크를 밟은 주제에, 다시 액셀을 밟아 빠르게 움직일 순발력이 내겐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애초에 멈추지도 않았을 터. 내가 그대로 멈춰있자, 택시기사님은 ‘뽜아앙’하며 마지막 화를 내보이셨다. "너 때문에 못 갔잖아"하는 마음이 아주 잘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당연하게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그놈의 노란불.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게 하는 노란불. 순발력 같은 건 없는 입장이었기에 나는 대체로 멈춰 서길 택했고, 나 때문에 함께 멈춰야 하는 뒤차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다. 급한데 앞을 막아 서 버리면 얼마나 답답할까. 어쨌든 뒤차가 화를 내고 있었으므로, 나는 꾸준히 되뇌었다.
‘신호 바뀌면 빨리 가야지’, ‘신호 바뀌면 바로 출발해야지’
그 탓이었을까. 초록으로 신호가 바뀌자마자, 나는 액셀을 와악- 밟으며 빠르게 달려 나가 좌회전을 했다. 좌회전 차선에 있다가 좌회전을 했으니 문제가 없.... 을 리 없었다. ‘신호가 바뀌면’을 되뇌던 나는, 정말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마자 출발했고, 그 초록불은 당연하게도 직진 신호였다.
내가 왼쪽으로 핸들을 트는 순간, 건너편 차선에서 이쪽을 향해 오던 차들이 미친 듯 뽱! 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건너편 차선도, 내가 있던 차선도 직진을 해야 하는 상황. 갑자기 튀어나와 좌회전을 하는 나 때문에 건너편 차들은 모두 깜짝 놀란 상태였다. 나 역시 깜짝 놀랐다. 5차선을 가득 채운 차들 모두가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순간 판단으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멈추면 또다시 교차로 한중간에 서 있게 되는 거니까. 튀어나간 속도 그대로 좌회전. 그곳엔 횡단보도가 있었다. 횡단보도 보행자들은 초록불에 맞춰 길을 막 건너려던 참이었다. 세상에. 그대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바로 멈추지 못했다. 액셀을 꽉 밟아 달린 속도가 있었던 탓에, 차는 '끼이이익' 하는 굉장한 소리를 내며 횡단보도를 지나친 후 멈췄다. 미친 듯한 좌회전 질주 후 미친 듯한 급 멈춤. 만약 1초라도 길을 빨리 건넌 보행자가 있었다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백미러로 뒤의 횡단보도 상황을 살폈다. 모든 보행자들이 내 차를 보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도 잘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무슨 미친 경우야?’하는 눈빛들.
미친 짓을 한 스스로가 매우 한심했지만, 그보다 절로 "어우, 다행이다"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느님, 부처님, 세상 모든 신들이여 감사합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의 멍청함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 나를 태우고 있는 이 쇳덩이가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정말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몰려드는 이런 순간엔, 그 자리에서 뿅 하고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지만 몸뚱이는 여전히 차 안에 있는 상태. 그대로 멈춰 서 있을 수도 없었기에 천천히 액셀을 밟아 목적지로 향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미치지 않고서야 직진신호에서 왜 좌회전을 한 거지?' 백 번 천 번 물어봤자 대답은 없었다. 나라는 인간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한문철 님은 '블랙박스'에서 말씀하셨다.
"신호를 잘 봐야 해요. 신호의 보호를 받는 순간에 움직여야 보호받을 수 있어요."
'신호의 보호'라는 생소한 단어를 천천히 곱씹어 봤다. 단순히 '가세요', '멈추세요'의 의미로 신호등을 봐왔던 나에게, 신호와 보호라는 단어의 연결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신호는 모두가 함께 지키는 '약속'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세계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건 그런 약속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법이나 규칙 등으로 정해둔 약속들을 다함께 지키니, 이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리라. 빨간불에선 멈추고, 초록불에서 움직이는 것도 전세계인이 함께 지켜나가는 약속인 거였다. 그 약속을 함께 지킬 때 이 세계 속의 개개인도 보호되는 것. 그 약속을 와장창 깨버린 나는, 정말, 도로 위의 빌런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