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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Oct 09. 2023

기절한 자동차, 타살일까 자살일까

차키를 꽂는다 ▷ 돌린다 ▷우웅우웅 자동차가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기어를 D로 바꾼다 ▷액셀을 밟으며 출발. 


차는 움직여야 했다. 며칠 전에도, 바로 전날에도 그러했듯이. 차키를 꽂고 돌리면 기다렸다는 듯 우웅우웅 소리를 내야만 했다. 애지중지 키웠던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그릉그릉 소리가 났던 것처럼, 차키를 꽂고 돌리면 우웅우웅 소리가 나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녀석... 날 태우기 싫어서 기절해 버린 걸까? 너무 긁고 다녀서 어디가 고장 나버린 걸까?  




초2였던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오자마자 선언하듯 외쳤다. 

"오늘 저녁에 친구 ○○ 오기로 했어! 같이 놀 거야!"

아들의 외침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학원은?"

이쯤은 예상했다는 듯 아들도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도 학원 마치면 5시래. 숙제 다 하고 학원 갔다가 만나기로 했어."

"........"

학교에서 함께 놀던 아이들이 저녁시간에도 같이 놀자는 대 결의를 이룬 상황이었다. 양쪽 엄마들의 질문을 예상한 아이들은 숙제도 학원도 모두 끝낸 후 만나자는 일정까지 스스로 잡았고, 학원에 가기 전 스스로 숙제를 해치우는 '놀라운' 모습도 보여줬다. 아이가 학원에 다녀올 때에 맞춰 나도 외출 준비를 했고, 집이 꽤 떨어져 있는 아이 친구를 차로 태워 오기로 했다. 초2들의 통화를 들으며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아이들은 숙제를 끝냈다는 자랑을 서로에게 하며 "빨리 와!"를 외쳐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나도 서두르는 게 맞았다. 느긋느긋 하다가는 잔소리와 짜증 폭격이 시작될 게 뻔했다. 


차키를 꽂는다 ▷돌린다 ▷우웅우웅 자동차가 깨어나.....질 않는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차키를 뺐다가 다시 돌리기를 여러 번. 어쩜, 드라마 각본도 이렇게 쓰지는 않을 것 같다. 아이가 재촉하는 이 순간에 하필 차가 정신을 놔버리다니. 너무 잔인하지 않나..? 아들은 "빨리 가~" 외쳐댔고, 엄마인 내 정신도 나가버릴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솔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차... 차에 시동이 안 걸려."

아이에게 힘겹게 고백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뭐? 어떡해? 고칠 수 있어? 얼마나 걸려? 택시 타고 갈까?" 쏟아지는 질문 세례. 할 수 있는 건 "잠깐만 있어봐!" 외치는 것뿐. 


생각, 생각이란 걸 해야 했다. 이럴 땐? 역시 검색 말곤 답이 없었다. '자동차 시동'으로만 검색해도 '배터리 방전'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줄 나왔다. 누차 말했듯, 차에 대한 사전 지식이라곤 정말 1도 없었다. 10 정도를 알면서 "1 정도는 알아요"하고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도 세상 어딘가에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겸손이라곤 배우지 못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글자 그대로 정말, 0.1도 아는 게 없었다. 차에 배터리가 있다는 걸 들은 기억은 있었다. 하지만 그 배터리가 충전식이라는 것도, 왜 방전이 되는 건지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길 위의 저 수많은 차들이, 그 수많은 운전자들이 이런 걸 신경 쓰면서 운전을 하고 있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인류는 위대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위대한 지성인들이 알려주는 대로 자동차 긴급 출동을 불렀다. 아이를 달래고, 기사님이 오시고, 죽은 줄 알았던 차가 살아나고, 무사히(좀 늦긴 했지만) 아이의 친구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1~2번쯤 더 방전 사태를 겪은 후엔, 배터리를 완전히 새것으로 교체했다. 무려 출장서비스 최저가를 검색해서 이룬 대업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외칠 때는 바보멍청이 같았지만, 이쯤 하고 보니 스스로가 좀 대견하기도 했었다. 와, 자동차라는 저 큰 기계에 문제가 생겼는데 스스로 뚝딱 해결했어.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혼자서 척척. 이렇게 하나씩 익혀가면 되는구나, 생각했었다. 




그리고 2주 남짓이 흘렀던가. 차에 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상황은 좀 더 긴박했다. 아이의 등교 시간이 다가오는 아침. 심지어 이 차를 주차한 건 바로 전날 저녁의 일이었다. 새 배터리로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아해하며 기존에 익힌 그대로 다시 긴급출동을 불렀다. 하릴없이 여러 차례 차키를 꽂아 돌려봤지만 묵묵부답. 배터리가 아니라, 차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최대한 빨리 와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른 시각임에도 기사님은 빠른 속도로 와 주셨다. 배터리를 교환한 지 2주 남짓 흘렀다는 말을 들으신 기사님은 고개를 갸웃하셨다. 

"이렇게 빨리 방전될 리가 없는데요?"

나 역시 차에 대해 뭘 좀 아는 사람처럼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그쵸, 이게 배터리 문제가 아닌 것도 같아요."

내 대답에 기사님은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운전석으로 다가가셨다. 나 역시 의아했다. 왜 보닛은 열어보지도 않고 운전석으로 가시지? 이런 건 엔진 쪽을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운전석 쪽으로 허리를 잠시 숙이셨던 기사님은 차 밖으로 몸을 펴시며 말씀하셨다. 

"기어가 P에 놓여있질 않네요."

사실, 나는 기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기어와 시동이 무슨 관계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 그래요?" 하고 되묻고는 멀뚱히 기사님을 바라봤고, 기사님은 한 마디를 더 덧붙이셨다.  

"기어가 P에 놓여있지 않으면 시동이 안 걸립니다..."


다시 스쳐 지나가는 전날 저녁의 상황.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주차장이 가득 찬 상태였다. 주차장에 자리가 있어도 주차는 어려운 것인데, 이렇게 자리가 없을 때면 평정심이라는 것이 나풀나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네를 돌고 돌아 주차할 만한 자리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자리가 '내 능력에' 가능한 것인지는 해보기 전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시도하다 안되면 포기. 또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몇 번의 그런 과정을 거쳤을 때는 주차고 뭐고 그냥 길 한가운데 차를 버리고 집으로 도망가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길가에 불법주차는 성공. '얼른 집으로 가서 눕고 싶다!!!' 생각했고, 최대한 빠르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었다. 아마도 그 과정 어디에선가 나는, 기어를 P에 두지도 않고 차키부터 빼버리는 미친 선택을 해버린 듯했다. 


세상에.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해요. 몰랐어요." 기어가 P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도 몰랐고, P가 아닌 다른 곳에 기어가 가 있으면 시동이 안 걸리는 것도 몰랐다. 기사님은 가지고 오신 가방을 으쌰- 메며 말씀하셨다. 

"기어 잘못 놓고 출동 부르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저도 직접 본 건 처음이네요.."

차라리 화를 내시는 게 어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기사님은 정확하고 확실한 단어들을 사용해 상황을 설명하셨다. 바쁜 아침, 바쁘다고 난리를 쳤던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진짜 몰랐어요, 바쁜 아침에 정말 죄송합니다" 거듭 말씀드릴 수밖에. 모르는 건 정말 죄가 아닐까? 여태 그렇게 주장해 왔지만, 이쯤 되니 남한테 피해를 주는 무식은 죄가 맞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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