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과제의 어설픈 달성 이후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약속이 생기면 '억지로' 차를 끌고 다녔다. 여전히 대중교통이 편했지만, 그렇게 살아서는 운전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초보운전자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많이 해봐야 실력이 는다”는 것이었고, 다닐 곳도 없는 육아휴직자는 약속이 생길 때라도 운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30분이 뜨면 1시간 먼저 움직였다. 처음엔 10~20분쯤의 여유시간을 갖고 움직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한 번 길을 잘못 들어 뱅뱅 돌기 시작하면 시간은 말 그대로 '순삭'됐다. 나는 지독한 방향치이기도 했으니까.
나름 나의 장점이라 생각했던 ‘미리 미리 준비’하는 성격이, 운전에는 큰 방해가 됐다. 길을 헤매는 데는 이놈의 준비성이 대단히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 조용하던 내비게이션님이 갑자기 말을 하시는 거다.
“700m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했다.
‘700m 앞에서 좌회전? 그럼 지금 미리 왼쪽 차선으로 가면 좌회전 할 때 편하겠지?’
왼쪽 차선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무사히 맨 왼쪽 차선으로 이동. 차선 변경이 세상 가장 어려운 초보운전자에게 성공적인 차선 변경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리 차선을 바꿔두면 자주 문제가 생겼다. 내비게이션님이 말씀하신 좌회전 지점은 한 블록을 더 가야했지만, 내 차는 이미 좌회전 차선에 놓여있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오른쪽 차선으로 다시 옮겨가서 직진을 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차선바꾸기를 그렇게 쉽게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다음은? 여기가 아닌 줄은 알지만 직진하지 못하고 신호에 따라 좌회전을 해야 했다. 띠띠띠띠.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나오는 내비게이션님의 호통을 들으며 “알아, 나도 아는데”를 외치며 일단 좌회전. 지구는 둥글고 모든 길은 이어질 테니 자꾸 가다 보면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하겠지, 생각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모든 길이 이어지는 것도 사실이고 지구가 둥근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한 번 길을 잘못 들고 나면 뱅뱅뱅뱅 돌아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큰 길만 가고 싶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를 이끄는 내비게이션님이 온갖 골목길로 가라고 하는 문제도 벌어졌다.
지금도 여전히, 내비게이션님의 안내를 들으면 미리 차선을 바꾸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친다. 성격이란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참으려 애쓴다. 아직 아니야, 저~~ 앞에서 좌회전하는 거잖아, 참아.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직 아니야, 하다가 막상 차선을 바꿔야 할 때 끼어들지 못해서 그대로 직진. 내비게이션님의 띠띠띠띠 분노의 샤우팅을 들으며, 님께서 얼른 화를 가라 앉히고 새 길을 찾아주시길 기다릴 수밖에. 목소리를 떨며 “어디, 어디로 가야해?” 외치면서.
“자, 이런 교차로에선 언제 신호가 바뀔지 알 수가 없어요. 오른쪽 횡단보도에 보행자들이 건너고 있으면 여유가 있구나 생각하고 가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눈치’를 보고 다른 차의 ‘흐름’을 보고 움직여야 해요.”
운전연수 당시 선생님이 해준 말이 떠오른 건 교차로를 지나면서였다. 눈치와 흐름. 이 말을 정말 많이 들었지만, 이것만큼 애매한 단어도 없었다. 다른 차들이 어쩌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일까. 앞만 보기도 벅찬데. 신호는 끝없이 바뀌고 앞차를 좇아가기도 버거운 이 상황에서, 눈치를 보고 흐름을 읽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아무튼 교차로를 지나며 문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고, 흘끔 오른쪽의 횡단보도를 봤을 땐 보행자 신호가 빨간불이었다. 어라? 이러면 도로신호도 곧 바뀌는 거 아닌가?
생각은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몰랐다. 앞차가 움직이기에 그냥 따라 갔고, 초록이었던 신호가 눈앞에서 빨강으로 바뀌는 걸 바라봤다. 빨강으로 변하는 신호를 보며 안심했다. 나는 빨간 신호가 좋았다. 차도에 빨간불이 들어온다는 건 멈춤을 의미했고, 그렇게 멈추면 잠시 쉴 수 있었으니까. 빨간불은 찰라의 ‘운전 휴식’을 선사하는 따뜻한 신호였다. 아아, 빨간불이네, 그렇다면 휴식타임. 잔뜩 긴장한 채 앞쪽으로 쏠려있던 몸을 뒤로 기대려던 그 찰나, 뒤쪽에서 “빵빵- 빵빵”하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음? 이건 여태껏 들어온 것과는 다른 느낌의 소리였다.
자동차를 보며 ‘사납게 생겼다’ ‘착하게 생겼다’ 등의 소리를 뱉던 나는, 그 공감 능력을 십분 발휘해 클랙슨 소리로 의미를 파악하는 놀라운 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가장 많이 들은 소리는 “빠앙-”하는 긴 소리. 이건 뒤차 운전자가 극한의 분노 상황은 아닌, ‘답답해, 빨리 가’ 하는 의미였다.(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겐 그렇게 들렸다) 빠앙- 빠앙- 소리가 들리면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 “뽱!” 하는 짧고 굵은 소리는 “미쳤냐! 운전 그 따위로 할래?”하는 빡침의 의미. 무리하게 차선 변경을 시도할 때 듣는 소리였다. 미쳤냐! 이리로 오지마! 그 소리가 들리면 차선 변경을 포기하고 일단 직진으로 달아나길 택했다.
지금 들리는 빵빵- 빵빵- 하는 소리는 처음 듣는 음절의 소리였다. “야, 야, 조심해”하는 느낌이랄까. ‘뭐지?’ 하며 뒤차를 백미러로 살폈다. 나는 교차로를 ‘꼬리물기’로 통과하던 중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앞차만 따르고 있었고, 앞차가 우뚝 서기에 나도 멈춰섰을 뿐. 빨간불이 들어왔을 때 내 차는 교차로 한 중간 즈음의 위치에 멈춰 서 있었다. 열십자 한 중간에 멈춰 다른 방향 차들의 통행을 완벽하게 막아서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거였다. 앞은 앞차에 막혔고, 양옆으로 차를 뺄 수도 없었다. 어떡하지, 생각과 동시에 나는 후진을 택했다. 빵빵- 빵빵- 내게 신호를 주던 차 앞으로 후다닥 후진을 하자마자, 차들이 내 앞을 휙휙 지나갔다. 쓰다보니 길지만,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차 운전자는 나의 초보딱지를 눈여겨 본 게 아닐까. 적절한 순간의 그 빵빵-이 없었다면 나는 교차로 한중간에서 차들의 통행을 막은 채, 온갖 뽱! 뽱! 뽱! 뽱! 을 듣고 있을 터였다. 아아, 선배 운전자님, 눈치를 갖추고 흐름을 모두 읽으시며 이 미천한 초보를 구해주시는 대선배님, 감사합니다.
이런 순간에는 상상하게 된다. 차 위로 전광판 같은 걸 얹고 다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고. 몇 가지 메시지를 미리 입력해뒀다가 지금 같은 순간에 글씨로 띄워드리고 싶다. "감사합니다! 복받으세요!"
이날의 경험 이후, 교차로에서는 좀 더 긴장을 하게 됐다. 꽉 막힌 교차로에서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초록불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가지 않고 우뚝 멈춰서는 차들이 교차로에는 종종 있었다. 그들은 신호의 변화를 '예측'해 교차로 한중간에서 빨간불에 걸릴 것 같으면 과감히 미리 멈춰서기를 택하는 듯 했다. 그들을 본 후, 나도 그 선배 운전자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교차로에서는 일단 주변 상황을 살피고, 보행자가 건너지 않고 있으면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앞차가 점점 멀어지지만 참고 참다가, 교차로 한 가운데에 내 차가 멈추지 않아도 될 공간이 생기면 그때 앞차를 좇아갔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뽱! 뽱! 뽱! 뽱!은 너무 무섭기에, 이렇게라도 대비(?)를 하고 있다.
‘운전하면 성격 나온다’는 말. 그 말의 의미를 요즘은 조금 알 것도 같다. 계획형 인간인 나는 미리 차선을 바꾸거나 교차로에서 미리 기다리는 형태로 성격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초보니까 이 정도의 모습만 나오는 게 아닐까. 운전에 더 익숙해지면 어떤 성격이 나오게 되려나. 쌍욕을 찰지게 내뱉는 그 녀석이 등장할 일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