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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과 나이와 살이

by 이림 Jan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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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도 보리밥을 택했다. 암 진단 후 가장 많이 찾은 집.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답해야 하나. '건강한' 메뉴 같아서? 암 진단과 수술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잘 먹어야지'라는 생각을 꽤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건 '잘'의 뜻. 영양소를 갖춰서 골고루 먹으면 되지, 하며 살아왔지만 골고루가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건강에 대해, 그리고 암에 대해 내가 아는 건 개뿔 하나도 없었다. 

암=퍼지면 죽는 병? 

그래, 그게 다였다. "나 암 이래" 울고불고 다니는 순간에도, 암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친해져 보려 이런저런 책을 찾아본 이후 더 헛갈리게 된 것도 같다. 누군가는 존재했던 암을 채식으로 없앴다고 주장했고, 또 누군가는 채식으로 기력이 떨어지면 건강한 세포마저 잠식당한다고 했다. 배우신 분들이 하는 얘기가 놀랍도록 다 달랐다. 


암 진단을 받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주일 정도의 기간, 나는 점심시간마다 뛰쳐나가 하염없이 걸었다. 좀 많이, 울었던 것도 같다. 대낮, 길거리,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울고 싶진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아이가 있는 집에서 울 수도 없었고, 동료들이 있는 회사에서 울 수도 없었다. 내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건 결국 점심시간. 길에서 질질 짠다고 해서 암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혼자 있으면 그렇게나 눈물이 났다. 아무튼 그 무렵 점심시간. 눈물콧물 다 짜내며 걷다가 문득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해!'라는 생각이 났다. 이전의 나였다면 한 끼쯤 가볍게 굶었겠지만, 진단을 받은 후엔 어떻게든 뭐라도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눈앞에 보인 게 보리밥집이었다. 이렇게나 오래 이 동네를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집. 흘긋 안을 봤을 때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기에 더 호기심이 일었다. 보리밥은 왜인지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도 결정에 힘을 실었다. 홀린 듯 가게로 들어섰다. 사장님은 물었다. "몇 분이세요?" 한 명이라 답하자 "저기 앉으세요"하고 자리를 지정해 주셨다. 빈자리가 있으면 사장님이 그리로 손님을 앉혔고 테이블마다 자연스레 합석이 이루어지는 가게였다. 메뉴를 고민할 새도 없이 탁, 하고 양푼이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안에는 계란 프라이가 하나. 주변을 스윽- 보곤 주문을 할 필요가 없는 곳임을 깨달았다. 보리밥 7000원. 메뉴라곤 보리밥 하나뿐이었다. 


다른 손님들을 따라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들 앞에 양푼이를 들고 줄을 섰다. 와, 온갖 나물들의 대향연. 원래 요리를 못하기도 하지만, 걔 중에서도 나물은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콩나물부터 무까지, 죄다 시도는 해봤지만 익히 아는 맛을 만드는 게 엄청나게 어려운 것임을 절절히 배웠다. 다듬는 과정에서부터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왔고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넣어봐도 맛 내기는 더 어려운, 그게 나물이었다. 실패를 거듭하며 대차게 결심했었다. 앞으로 평생 나물은 사 먹고 말 테다. 그런 나였기에,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저 나물의 대향연이 엄청나게 좋았다. 얘는 콩나물, 얘는 시금치, 그리도 에 또.... 너는 초록, 쟤도 초록. 죄다 초록이들. 안타깝게도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통성명이라도 해야 거리감이 줄어들 텐데. 미안하다. 얘들아. 아아,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감이란. 


아무튼 양푼이에 보리밥을 놓고, 그 위로 온갖 초록이들을 한껏 욕심내어 올렸다. 이름은 몰라도 먹어치우는 건 잘 해낼 수 있었다. 고추장이라 적힌 빠알간 병을 들고 두 바퀴를 휘휘, 참기름은 작게 한 바퀴만 돌렸다. 커다란 보온밥솥에 들어 있는 된장국도 국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착석. 길에서 질질 짜던 건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 있었다. 현재의 나는, 그저 침을 꼴깍대며 밥을 비비고 있을 뿐. 밥을 비벼대며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이 가게에서 나는, 최연소자인 것 같다고.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어떤 공간에 들어앉아 '내가 젤 어린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하는 건 매우 엄청나게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보리밥집에서만큼은 내가 꼬꼬마인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애매하게 '같았다' 같은 종결어미를 쓸 필요도 없었다. 이 보리밥집에서 나는 정말로 확실히 가장 꼬꼬마였다.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에 꼬꼬마는 한껏 움츠러들어 조용히 밥을 먹었더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옆자리 대화가 들렸다. 


"들었나,  걔 ○○, 암이란다."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봤다. 어르신들은 대화에 집중해 내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시는 듯했지만, 나는 혼자만의 엄청난 비밀을 들켜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쿵쿵. 귀를 쫑긋. 암이라니. 누가 또 암에 걸렸다니. 내 세상에만 암이 가득 들어찬 줄 알았는데, 누가 또 이런 세상을 맞이하고 있는 거야? 대화는 이어졌다. 

"무슨 암?"

"유방암이라 카대."

왜인지 숙연해져 숟가락질을 멈추게 됐다. 세상에. 갑상선암도 충격인데 유방암은 얼마나 더 충격을 받았을까. 듣는 저분도 놀라시겠다 싶었지만 웬 걸. 상대는 강했다. 

"옛날에나 암으로 픽픽 죽었지, 요새는 암 걸려도 다들 잘 살더구먼. 많이 심하다나?"


캬. 그 순간 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확실한 건 그 기세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암 진단을 받고 나는 내 세계에 빗장을 걸어둔 상태였다.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고, 밖에서 들리는 작은 자극에도 파르르 반응하며 움츠러들었다. 암이라는 단어를 일단 숨기고, 평온을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글쎄. 왜 그렇게 숨겼을까. 주변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온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그 단어 '암'을 남에게 건네 암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어르신은 무심한 듯 시크하게 툭 암이라는 단어를 꺼내셨다. "다들 잘 살더구먼"이라는 문장을 들을 때는, 암에 걸린 나 역시도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작 갑상선암으로 픽픽 죽을까 봐 잔뜩 쫄아 움츠렸는데, 암이라는 것이 일상 곳곳에 흔하게 스며있음을 이 순간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엄청나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숨겨야 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고. 어르신들 덕분에 그 당연한 걸 알게 된 순간, 또 다른 테이블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기 뭐꼬, 여는 이래 풀떼기만 있노. 이래 먹어가 힘이 나나."

"뭐라노. 니는 유튜브도 안보나. 거 뭔 박사 윽쑤로 유명한 그 사람이 채소를 많이 무라 하드라."

"그거는 젊은 아들 말이지. 늙을수록 고기를 더 무라 하드라."

"니 그러다 암 걸린디. 채소만 먹어야 암 안 걸린다 카더라."

"지랄한다. 누구는 고기 먹으면 암 걸린다 하고, 누구는 흰밥 먹으면 당뇨 온다 하고. 뭣이 그래 복잡노. 늙으면 고마 팍 죽어뿌야지."


보리밥집은 그런 곳이었다. 짬에서 우러나오는 명언들을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곳.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말, 내 심경을 저렇게나 정확히 표현해 주시다니. 그래! 뭣이 그래 복잡노. 채소만 먹으라 했다가, 고기까지 먹어서 기운 내라고 했다가! 

그날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온갖 보리밥집을 찾아다녔다. 이 번화가에 보리밥집이 총 네 군데 있음을 알게 됐고, 그곳들을 번갈아 가며 다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이 세상 어딘가에 '보리밥집 운영 방침'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네 곳의 보리밥집이 놀랍도록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보리밥 혹은 쌀밥을 택해 양푼이에 담고 촤르르 놓여 있는 나물을 셀프로 담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휘리릭 곁들여 비벼 먹는 형태. 시세는 6000원, 7000원, 9000원으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 시세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있었다. 그건 바로 계란 프라이의 유무. 6000원 보리밥집에선 계란 프라이를 구워주시지 않았다. 대신 요구르트와 훈제계란을 줬다. 테이블 간격도 가장 좁았다. 7000원 보리밥집부터 계란 프라이를 맛볼 수 있었다. 조금 한가한 날이면 사장님이 묻기도 했다. "몇 명? 반숙?" 처음에는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네?"하고 되물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1명요, 반숙요"하고 대답하며 경험치를 뽐냈다. 그리고 9000원. 여기서부턴 무려 제육볶음이 등장했다. 보리밥집이라는 간판 옆에 있는 한식뷔페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집이기도 했다. 나물 수도 압도적으로 많았고 제육볶음과 쌈, 떡볶이, 식혜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모든 보리밥집의 공통점이라면 주 고객층이 60~70대라는 것. 어느 가게를 들어서든 어르신들 틈에 끼여서 밥을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건방지게(?) 앉아있는 듯한 불편함도 느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찾아오면 또다시 홀린 듯 보리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강한 음식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글쎄. 그것도 꽤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겠으나,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 봐도 내가 자꾸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다른 거였다. 보리밥집에 웅크려 밥을 먹으며 다른 테이블의 대화를 엿듣는 게 나는 좋았다. 스토커? 변태? 뭐라 부르든 아무튼 나는 그 대화들을 듣기 위해 보리밥집을 찾아다녔고, 그 대화를 통해 위로를 얻었다. 


암 진단 이후의 나는, 꽤나 위축돼 있었다. 남들의 세계는 그대로인데 내 세계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그 모든 지각변동이 '잘못 살아온'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나름은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같은데, 남은 게 병밖에 없다니. 그 자각이 꽤나 아팠다. 뭘 하든 서글펐다. 젠장. 힘들어. 또 힘을 짜내서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하다니. 그게 참, 싫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 있던 무렵이었기에, 또래와 밥을 먹을 때면 소외감을 느끼곤 했었다. 내 또래 누구도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지인들의 세상에선 예나 지금이나 '맛'이 중요했고, 메뉴를 고르는 과정에서부터 나는 내 세계가 달라졌음을 혼자 느꼈다. 야채를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인스턴트는 좀 꺼려지는데, 해물이 갑상선에 안 좋다 그랬던 것 같은데 등등. 온갖 기준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내 세계는 메뉴 하나도 고르기 어려운 상태로 휘청이고 있었지만 지인들의 세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온전했다. 평안했다. 한 마디로, 나와는 달랐다. 누군가와 밥을 먹을 때마다 그 차이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훌쩍, 보리밥집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나 마음이 편했다. 그곳에선 건강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이 테이블에서도 저 테이블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건강 이야기가 나왔다. 나물이 확실히 소화가 잘 되더라, 전자레인지로 음식 돌려먹으면 안 된다더라, 누가 누가 암에 걸렸다더라 등등. 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해진 문제가 보리밥집에서는 늘 중요하게 다뤄졌고, 그 대화를 들으면서 묘한 안도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내 삶의 속도가 남들의 것보다 조금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건방지게도 그랬다. 좋은 쪽으로는 전혀 없고 오롯이 나쁜 쪽으로만 가속도가 붙은 삶. 부모님도 일찍 보냈고, 결혼생활도 빨리 끝냈고, 암이라는 병도 평균치보다는 이르게 찾아온 것 같다는 자기 연민. 그런 걸 버텨내는 스스로가 딱하기만 했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겉도는 듯한 느낌도 종종 받곤 했었다. 부모님 이야기도, 남편 이야기도, 시댁이야기도, 그저 듣고 있을 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의 내겐 다 지난 일이니까.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친구들의 세상은 여전히 저 자리에서 평안히 돌아가고 있는데, 내 세계는 그곳에서 떨어져 홀로 동동 떠다니는 듯한 느낌. 그런 거리감을 느낄 때마다 외로웠다. 어쩔 수 없이 그랬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을 멈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끝을 생각하게 됐었다. 가속도가 붙은 듯한 이 삶의 끝은 언제쯤 닥쳐올까. 예상치 못한 때에 아이와 이별하게 되어버리면 어쩌나. 모두에게 삶은 간절할 텐데 내가 원한다고 더 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들에 파묻혀 버릴 것 같을 때 나는 보리밥집을 찾는다. 그리고 대화를 엿듣고, 가끔은 생각한다. 나도 이분들처럼 늙어가고 싶다고. 그런 욕망을 품고 귀를 쫑긋 거리며 밥알을 삼킨다. 그리고 요즘, 요즘은 유난히 밥알이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는다. 밥 한 톨 씹어 삼키기 어려울 이들이, 그 마음들이 울컥하고 치솟아 내 목구멍을 막는다. 그런 날들이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 글은 원래 지난주 12월 28일 토요일에 정리를 했었습니다. 일요일에 한 번 더 보고 업로드해야지 했는데, 29일 아침 제주항공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글을 올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저 하나의 늙어감을 욕망하는 이 글이 너무나 같잖고 사치스럽고 죄스러워서 그냥 올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마음이지만, 일요일 발행 글을 더 오래 붙잡고 있기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유명작가도 아닌 주제에 웬 난리야, 일요일 발행을 매주 지킨 적이 언제였나, 싶은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3주나 연재를 안 하려니 마음이 불편해서 고민하다가 올려버립니다. 아무 일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이나 끄적이고 있는 이 순간이, 이래저래 죄스러운 날들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는 인사도 허망해서 못 건네는 이런 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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