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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Oct 20. 2023

리안, 어린이집에 가다

육아 vs 일, 그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하여

  육아를 하며 손에서 놓았던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태어나자마자 대기를 걸어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집 바로 근처, 걸어서 5분 거리에 국공립 어린이집이 있어 임신육아종합포털 '아이사랑' 앱에서 대기 신청을 했다. 신청 완료 되기가 무섭게 원장님이 연락을 해왔고, 바로 다음날 면담을 할 수 있었다.


  원장님의 환영을 받으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린이집에 첫 발을 디뎠다. 밖에서는 규모가 작아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갔더니 생각보다 넓은 데다 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옥상은 인조잔디가 깔린 야외 놀이터로 사용 중이었고, 쾌적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도 좋아 보였다. 여름에는 어닝을 펼쳐 놓고 수영장을 설치해서 물놀이도 한다는 원장님의 설명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텃밭에서 직접 채소를 키워 먹으며 절기 교육을 하고, 인근 산에서 숲체험도 하는 자연친화적인 활동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시설을 돌아보는 동안 리안이도 마음에 들었는지 꺄륵꺄륵 웃으며 좋아했다. 원래대로라면 입소 대기 순에도 들지 못했지만, 한부모에 기초생활수급 자격으로 1순위가 되었다. 그렇게 3월 2일 입소가 확정되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입소 전의 오리엔테이션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리안이와 같은 교실을 사용하게 될 어머니들과 인사를 하고, 담임 선생님의 소개와 함께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 지켜야 할 사항들을 안내받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지만 새 학기가 시작될 때의 설렘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아이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대하던 첫 등원일 아침이 밝으며 아이의 첫 사회생활도 시작되었다. 첫 주의 적응기간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지나갔다. 리안이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낯을 가려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 덕분인지 처음 만난 선생님의 품에도 잘 안기고, 친구들과도 금방 잘 어우러져 놀이를 했다. 학창 시절, 새 학기 첫날 친구를 잔뜩 사귀고 돌아오던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다음날, 1시간이 채 안 되는 꿀맛 같은 시간을 빨래와 청소로 보내고 나니 금세 하원시간이 돌아왔다. 적응이 빨라 바로 분리 시도를 해봤는데 이 역시도 성공적이었다. 엄마도 찾지 않고 잘 놀았다는 선생님의 말에 퐁실퐁실한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며 칭찬을 늘어놓았더니, 리안이는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노는 것도 피곤했는지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힙시트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암, 사회생활이 그런 거란다. 그래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힘찬 응원을 보냈다.


나를 춤추게 만든 1++ 한우. 행복의 순간은 매우 짧았다.

  그리고 셋째 날. 교실에 함께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아이와 헤어졌다. 점심까지 먹고 하원을 하기로 해서,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이게 얼마만인가. 1년 하고 2개월을 오롯이 혼자 육아하던 나에게 잠깐의 여유는 귀하디 귀한 것이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잘 썼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날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는 전날 서울에 잠시 다녀간 아빠가 사다준 1++ 한우가 있었다. 쌈채소와 파무침까지 풀세트 구성이었다. 프라이팬을 꺼내 한우의 겉면을 빠르게 익혔다. 가장 예쁜 그릇에 옮겨 담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일단 눈으로 먼저 느껴보았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감격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입으로 야무지게 싸인 쌈이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무릉도원을 거닐고 있는 신령님처럼, 허허 웃음이 나는 맛이었다. 한우가 투플러스여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의 여유는 그렇게나 달콤한 것이었다.


  내가 행복에 겨운 한 끼를 즐기고 있을 때, 어린이집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 엄마 품에 안겨 돌아가자 리안이가 눈물을 보이며 엄마를 찾는다고 했다. 나는 한우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다. 눈물이 잔뜩 고인 얼굴로 품에 안기는 아이를 꼭 안아주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이집에 너무 일찍 보내서라기 보다는, 혼자 고기를 먹으며 흥에 겨워 춤까지 추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엄마의 품에 안겨 맡았던 고기 냄새는 확실히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적응을 잘 해준 덕분에, 오래전 나에게 슈가 아트를 가르쳐줬던 선생님의 제안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근무시간은 10시부터 6시까지. 슈가 케이크 전문점이었는데,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로 돈까지 벌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첫 출근을 하루 앞둔 날, 갑자기 열이 나며 오한이 들었다. 코로나 검사를 해봤더니 선명한 두 줄이 떴다. 리안이의 검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다닌 곳이라고는 얼마 전 예방 접종 때문에 들렀던 병원과 어린이집이 전부인데, 의아한 일이었다. 리안이를 안고 선별진료소에 가서 검사를 한 뒤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간의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고, 나의 첫 출근도 일주일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나의 주된 업무는 설탕 반죽으로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드디어 첫 출근. 내가 할 일은 크게 케이크 시트를 굽고 설탕 반죽을 만드는 것과, 케이크에 올릴 디테일한 데커레이션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근무 시간 동안은 눈코 뜰 새도 없이, 출근과 동시에 퇴근하듯 시간이 삭제되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리안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하려는데, 원장님이 오늘은 등원이 안된다고 했다. 리안이 담임 선생님이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는 연락을 아침에 갑자기 받았는데, 원칙상 해당 반 전원 등원이 불가하다는 설명이었다. 출근시간이 임박한 워킹맘들은 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첫 출근을 한지 하루 만에 결근을 하기에는 민폐인지라, 나는 동생들에게 급하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다. 여동생은 요리학원 강사라 수업을 펑크 낼 수 없었고, 남동생은 휴가를 내보겠다고 했다. 소식을 전달받은 아빠는 엄마가 바로 서울로 올라갈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남동생이든 엄마든 도착하려면 출근 시간을 맞추기에는 한참 늦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날은 결근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코로나 확진 후 격리해제된 원아는 등원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내가 출근하기로 하면서 주문을 더 받은 데다 작업 스케줄이 밀려 결국 엄마가 계시는 동안은 일찍 출근을 하고 늦게 퇴근을 했다.


  그 난리통을 보내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리안이에게는 농가진이 찾아왔다. 수요일부터 허리와 가슴에 수포가 올라왔다 터졌는데, 금요일 새벽 내내 자지러지게 울며 잠을 통 자지 못했다. 덩달아 나 또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새벽에 기저귀를 갈아주려다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리안이의 엉덩이 상태는 차마 눈뜨고는 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피부가 다 벗겨져 진물이 흐르고 있었고, 피 투성이의 엉덩이가 기저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온몸으로 퍼진 수포가 터지면서 여기저기 벗겨진 상처들로 뒤덮였다. 조금만 건드려도 고통에 울부짖는 리안이를 보며 나도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토피로 치료 중이던 한의원에서는 농가진이 맞으니 일단 한방 치료를 중단하고 소아과에서 항생제를 처방받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방문한 소아과의 의사 선생님은 가뜩이나 약한 피부에 얼마 전 코로나까지 걸려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이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속상한 마음으로 또다시 나는 결근을 한다는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첫 출근이 미뤄지고, 어린이집 사정으로 결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결근 소식을 들은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되니 아직은 일 할 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고용주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애초에 아이의 상황에 다 맞춰 준다고 해서 이뤄진 계약이었기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일과 육아의 양립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아이가 좀 더 클 때까지 육아에 집중하기로 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새로운 사람을 구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후 두 명이 면접을 봤고, 그중 한 명이 출근을 하기로 했지만 결국 그 채용은 불발되고 말았다.

  출근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연락을 했더니, 방금 잠에서 깬 목소리로 사정이 생겨 출근하지 못하겠다고 통보를 했다고 한다.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적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계속 근무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그때 거절했어야 했다.

주식이 된 샌드위치와 고 카페인 커피우유로 하루를 버텼다.

  일을 하는 중간에는 밥을 먹을 시간도 마땅치가 않았다. 출근길 편의점에서 늘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서 작업 도중에 먹거나, 선생님과 함께 삶은 달걀과 과일로 대신하거나 하기 일쑤였다. 출산 후 원래대로 돌아왔던 체중이 육아를 하면서 그대로 불어났는데, 그렇게 빼기 힘들던 살이 일을 시작하고 나니 그 이상으로 빠져버렸다. 일거양득이랄까. 돈도 벌고 다이어트까지 성공하니 잘 되었다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연예인 조공 케이크, 기업 행사 케이크의 주문이 몰리면서 일은 말 그대로 폭탄이 되어 날아들었다.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선생님의 멘털도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때는 근무를 좀 더 해달라는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나는 마지못해 퇴근을 미루었다.


  4월의 어느 날은 리안이가 열이 많이 난다며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었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퇴를 하려는데 조금만,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퇴근 시간이 되었다. 선심 쓰듯 어서 퇴근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이 리안이는 열이 계속 올랐고, 저녁 8시를 기점으로 40도를 넘겼다. 여태껏 그렇게까지 열이 오른 적이 없어 너무 당황스러웠다. 해열제를 먹이고 옷을 다 벗겨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았다. 줄줄 흐르는 눈물도 닦으며 육아 선배인 여동생에게 조언을 구하려 전화를 했더니, 일단 대학병원 응급실로 출발하라고 했다. 급히 택시를 호출해서 타고 이동하는 사이 리안이의 몸이 점점 처지는 것이 느껴져 무서웠다.

40도가 넘는 고열로 응급실에 갔던 날.

  접수를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겨우 들어간 응급실. 자리를 배정받고 또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여러 의사들이 번갈아가며 찾아와 물었던 내용을 묻고 또 물었다. 같은 대답에 슬슬 지쳐갈 때쯤, 세 시간이 다 되어서야 편도염이라는 진단과 함께 겨우 한 자리 남은 외래진료 예약을 했다. 퇴근 후에 병원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제부가 데려다준 덕분에 그래도 돌아오는 길은 편안할 수 있었다. 다음날, 외래 진료를 위해 병원에 다시 방문을 했다. 요로감염을 의심한 교수님은 소변검사를 하자고 했다. 검사 후 며칠이 지나도 열이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원인으로 확인된 것은 편도염이었고, 염증이 가라앉으면 열도 내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황들은 계속되었다. 이름도 어려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일명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서둘러 출근길에 올라도, 출발역에서부터 이미 지하철은 멈춰 서서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2호선 라인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 모두가 핸드폰만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방배동으로 가는 노선의 버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1시간 36분이나 걸리지만 그마저도 감사해야 했다. 버스정류장에 빽빽하게 들어서서 한 방향으로 고개를 쑥 빼고는, 언제 올까 싶은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우리들이 마치 미어캣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퇴근길에 지하철 안에 갇혀 어린이집이 끝나는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날이 많아지니 출퇴근만으로도 지쳐갔다.


  여름휴가 시즌이 다가왔을 때였다. 선생님은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하루 쉬어야겠다고 했다. 이후 일주일 정도는 그냥 쉬고, 그다음 주는 내 휴가기간이니 잘 다녀와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연이어 8월 한 달은 여행을 하며 쉬겠다는 말과 함께, 바빠지면 다시 연락 주겠다는 문자를 끝으로 나는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여러 상황들을 되돌아보니 일을 하는 데 있어 방해요소가 너무 많았던 데다, 일을 계속 이어간다 해도 결국 선생님과의 끝은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육아에 전념하기로 마음이 더욱 기울었던 탓에 나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으니, 차라리 편히 내려놓는 것이 내가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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