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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g Sep 19. 2023

사그라진 불꽃

하얀 가루 더미 안에서

‘하얗게 불태웠다’는 말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캠프파이어나 바베큐를 하고 나서 다음날 아침이면 보이던 그 하얀 재. 잿가루는 검정색인줄로만 알았는데 하얗게 변해버린 연탄이나 바닥에 남은 재를 보면 이것이야말로 전부를 소진해 버린 뒤에 남은 것이로구나 싶다.


흰색과 검은색의 어원은 사실 같다고 한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다는 無에서 온 건데, 이 ‘아무것도 없는’ 또는 ‘비어 있는’ 상태를 색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 각자 다른 단어가 되었다고 한다. 영어로는 검은색이 black이고 스페인어로는 흰색이 blanco인 것이 그 예다. 한국어나 중국어에서 텅 비었다거나 아무것도 없다는 뜻을 가진 것은 하얀색 白色 쪽이다. ‘헛’ 수고, ‘헛’ 발질 등의 ‘헛‘을 표현할 때 중국어에서는 역시 白를 쓴다. 초음파 검사에서도 무엇이 ‘있으면’ 검은색이 보이고 흰색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최근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고, 일상에서 색채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일부러 특별한 순간을 애를 쓰고 만들어내야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하얗게 불태웠다는 정도는 아니다. 하얀 정도까지 태워야 하는 걸까 의문도 든다. 벼락치기나 막판 스퍼트보다는 잔잔하고 꾸준한 접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불이 어쩔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확 꺼져버렸다. 그래도, 큰 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불꽃이 사그라진 뒤에도, 잔잔한 작은 불씨는, 온기는, 남아있다. 이제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을지 모르는 나의 작은 불씨를, 없다면 미처 식지 않은 온기라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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