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 차의 시동을 걸자 라디오 뉴스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세상 살아가며 오히려 세상에 무관심해지는 모순을 겪던 당신은, 좀체 반갑지 않은 소식뿐인 뉴스를 겉치레로 흘려들을 뿐이었다. 어디 가서 아는 척은 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날 분위기는 좀 달랐다. 절망 가득한 앵커의 목소리를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거대한 해일이 세상 어딘가를 덮쳤다고 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해안선은 영구적으로 바뀌었다. 참담한 소식이었다. 본능적으로 한숨을 쉰 당신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다만 조금은 먼 세상의 일이었다. 그게 아니면 밀려오는 해일 앞에서 그처럼 한숨만 쉬고 있을 리 없다. 자기 눈앞에 닥친 일이 아니므로, 결국 타인의 비극. 어쩌면 속으로 당신은 내가 저기 없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이 저기 있다 한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 위로 치솟은 파도 앞에 서서 하필 지금이냐며 찌푸리거나, 푸념조차 내뱉을 새 없이 휩쓸려갈 뿐이다. 다만 누군가의 비극 앞에서 어느새 ‘원근’을 두고 있는 당신은, 얼마나 차가워진 걸까. 예전엔 좀 더 공감할 줄 알았다는 생각에 몹시 씁쓸했다.
그처럼 떫은 생각에 잠겨 뉴스를 듣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지명이 당신의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해일이 휩쓸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폐해진 곳.
“그곳.”
그곳을 입에 넣고 웅얼거리자 어렴풋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설마, 그럴 리가.’ 다시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나운서는 감질나게 알고 싶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라디오를 포기하고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 끝으로 조바심 내며 이곳저곳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곧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마음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당신은 얼마 전 그곳에 있었다.
바로 알아채지 못한 건 최근에 바뀐 그곳의 이름 때문이었다. 익숙했던 옛 지명은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한들, 당신은 그만큼 그곳에 무뎌져 있었던 것이다. 아나운서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인류의 죄악이고 슬픔입니다.”
물론 당신의 슬픔 따윈 비극의 파도에 휩쓸려간 많은 사람들에 비할 수 없다. 다만 그 순간, 당신 안에서도 무언가가 휩쓸려나간 듯했다. 마치 예리한 무언가가 살갗을 파고들어 잊고 있었던 후회의 살점을 도려낸 듯, 몹시 차고 불쾌한 고통이 뒤따랐다.
진땀을 흘리며 겨우 집에 도착한 당신은 그대로 현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부터 당신은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당신은 때때로 해일과 마주한다. 현실처럼 생생한 꿈. 전개는 조금씩 달라도 결말은 늘 같다. 결국엔 높은 파도에 휩쓸려 저 아래로 내동댕이쳐진다. 허무한 최후를 직감한 당신은 몇 계단 발을 헛디디는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뜨면 주위는 아직 어둡다. 다리엔 미세한 경련이 느껴진다. 허공에 다리를 버둥거린 탓이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당신은 두 다리를 주무르며 위화감을 다스린다. 다시 잠들기 어렵다. 하루에 같은 꿈이 반복될 리 없지만 두렵다. 당신은 몸을 일으켜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와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떠올린다. 까마득한 밤의 미궁 속에 사라진 꿈의 전말을, 소망과 절망에 관한 기억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억은 잊는다고 잊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현듯 떠올린 것이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기억은 선명하다.
당신은 그곳에 있었다. 일행 없이 혼자였고, 할 일을 모두 마친 뒤 그곳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예전에 여행했던 곳인데, 갑자기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은 육지의 긴 등줄기 따라 내려간 곳에 있었다. 길고 긴 기차 여행의 끝이었고, 문득 확 트인 바다가 보고팠다. 그래서 가까운 그곳으로 향했다. 거기서 뜨뜻미지근한 맥주 한 병을 사들고 모래사장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여기서 또 어디로 갈지를 고민했다. 더 내려갈까, 그만 멈출까. 그러다가 결국 거기서 그만 멈췄던 기억이다. 그땐 돌아서며 생각하길, 다시 올 기회는 얼마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 여행이라도 한 듯, 그로부터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훌쩍 흐른 것이었다. 재회의 기분을 좀 내봐도 될 듯했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삼발이를 불러 세웠다. 그곳의 흔한 교통수단. 하나의 운전석에 두 명이 끼어 앉아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럴 경우 필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법이지만, 어쩐 일인지 방심하며 경계를 늦췄다. ‘까짓 거 해봐야 얼마나 바가지를 씌우겠어?’ 이젠 한 푼이 아쉬운 여행자가 아니라며 오만을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냐며 고개를 돌린 그들에게 당신은 호기롭게 외쳤다.
“그곳으로 가지!”
정확히 그곳 어디쯤으로 가냐고 묻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곳 어디로 가야할지는 당신도 모르는데다가, 해변은 길고 시간은 많았다. 그런데 역시 너무 호기를 부렸을까, 운전석의 둘은 곧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미 약속한 요금은 편도란 것이다. 그래서 실랑이를 벌일 즈음, 삼발이는 해변의 좀 어중간한 곳에 멈춰 섰다. 거기서 다른 차를 잡기란 피곤해진 상황이었다.
“약속한대로 왕복 요금이니까, 여기서 기다려.”
당신은 딱 잘라 말하며 요금의 반만 지불한 채 걸어서 해변으로 향했다. 딱히 다른 수가 없었다. 한참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데 야시장이 하나 보였다. 예전에도 그런 곳이 있었던 기억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때와 같을 리 없는 풍경이지만, 감상에 취한 탓인지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야시장이라고 해봐야 여전히 모래 위에 가판대를 몇 개 가져다 놓았을 뿐이다.
당신은 비린내 가득한 가판대 사이를 통과해 곧장 바다로 향했다. 예전처럼 지친 몸을 달래며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었다. 다만 예전보다는 무거운 고민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 당신의 인생이 뜻한 바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예전의 그것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계속 할까, 아니면 그만 포기할까?”
그런데 바다는 달랐다. 그때처럼 당신을 환대할 기분은 아닌 듯했다. 수평선까지 하늘 가득 먹구름이 껴 있었고, 다가갈수록 요동치는 거친 바람과 마주해야 했다. 파도와 거리를 두고 서 있었지만, 장풍처럼 밀려든 바람이 해변에 꽂힌 깃발들을 사정없이 나부끼더니 여세를 몰아 당신의 머리칼을 사방으로 휘저어 놓았다. 머리칼 따윈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다만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해변 밖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당신은 마치 어른의 성마른 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끌리는 아이 같았고, 차분히 순간을 곱씹을 사이 없이 바람에 밀려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돌이켜 보면 매우 불길한 전조였다.
파도와 바람을 등지고 돌아 나오자 아까의 삼발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삼발이는 보이지 않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대로 뒷좌석에 타서 그만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옛 추억을 되새기며 이곳저곳 찾아가볼 마음은 이미 접은 뒤였다. 그런데 이인 일조의 콤비가 또 문제였다. 이제 대어를 낚은 낚시꾼으로 돌변한 그들은 가는 내내 없는 말을 지어냈다. 계속해서 왕복이 아닌 편도였다고 우긴 것에 더해 해변에서 기다린 비용도 추가해야 한다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당신을 앞뒤로 막아서며 말했다.
“그럼 미터기대로 계산할까요?”
어지간하면 넘어가려 했지만, 순간 당신은 폭발하고 말았다. 최대한 점잖게 해결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을 듯했다. 돌변한 당신은 성난 말투로 둘을 나무랐다. 그러자 움찔한 그들이 뒤로 물러섰고, 때마침 당신은 약속한 금액의 나머지 반을 던지듯 건넨 채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등 뒤로 불만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신은 무시하고 곧장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했다. 자칫 싸움이 커져 구경꾼이 몰려들면 곤란했다.
당신에게도 나름의 도박이었다. 그러고 보니 애당초 당신의 주머니엔 더 이상의 현금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모든 일정이 끝났고 현지 돈을 어중간하게 남기면 손해였기 때문에 환전을 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속사정이 없었더라면, 그런 곳에서 그런 문제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한 번 속은 셈 치고 손해를 감수했을 수 있다. 어쨌거나 당신은 곤란한 상황을 그런 식으로 넘길 수 있었다.
다만 뒷맛은 좀 씁쓸했다. 당신은 어쩐 일인지 제법 크게 화를 내고 말았다. 그들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주와 경멸을 퍼부었던 것인데, 왜 그랬을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당신은 이미 심신이 피로해져 있었다. 찝찝한 후회의 여운을 길게 붙들어 두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이 자꾸 머릿속을 울려댔다.
다음날, 귀국 행 항공편은 오후였지만 당신은 일찌감치 오전부터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하필 그날은 비행기가 연착되었고,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을 더 공항에서 보낸 뒤에야 도망치듯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고대했더라도, 다시 만난다는 게 꼭 좋은 일이기만 한 걸까?’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그곳에 해일이 닥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해일이 그곳을 휩쓴 이후, 기억은 계속해서 당신의 마음을 괴롭혔다. 눈앞의 일에 몰두한 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씁쓸한 기억을 해일이 소환해냈던 것이다. 그곳의 해변, 바람, 파도와 함께 그때 지나쳤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당신이 저주를 퍼부었던 그 이인 일조는 어떻게 됐을까. 해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해안선은 그 모습이 영원히 바뀌었다고 하니, 다행히 생명은 부지했더라도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인생은 해일에 휘말렸을 것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휩쓸려 사라지는 광경을 상상하며 당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까짓 몇 푼 되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한때 그곳은 당신의 꿈이었다. 쩨쩨하게 굴지 말고 좀 더 너른 마음으로 대했어도 된다는 것을, 왜 지금에야 아는 걸까.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그건 이제야 깨닫는 것으로 그때 알았다면 물론 오늘의 당신은 없다. 다만 수많은 죽음을 불러온 비극 앞에서 당신은 그렇게 말할 뿐이다.
“부디 모두 무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