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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Jan 26. 2024

_당신은 그날의 파도를 기억합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소망은 좀 시들해졌다. 삶은 바라는 길만 걷게 하지 않았고, 당신은 멀리 ‘다른 곳’을 자꾸만 돌아가야 했다.


  다른 곳에선 그랬다. 총성이 울린 다음부턴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앞으로 달리며 당신은 점차 낯선 사람이 되어 갔다. 무릇 눈앞의 일을 헤쳐 나간다며 부정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결과만 좋다면 비틀어진 과정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고, 때때로 희열마저 느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당신은 그곳에서 한참을 더 멀어지게 되었다. 어제의 소망을 업신여기고, 오늘 싫어한 모습을 내일의 자신으로 삼으려던 당신은, 거울 속에서 바라지 않던 자신의 모습과 마주했다. 그러나 반성은커녕 불가피한 현실이요, 세상의 이치라며 변명했다.

  반면 당신 곁의 사람들은 알았다. 당신답지 않다고, 변했다며 일침을 놓았다. 물론 당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독 자신에게만 냉담하다며 불만을 터뜨렸고, 그대로 등을 돌려 연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늘 타인의 눈이 더 정확했다.

  당신은 많이 외로워졌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그런 식으로 고집 부릴 일이 아니었다. 계속 앞으로 달리다 보면 끝이 나올 줄 알았지만, 애초 그 달리기의 결승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스로 멈춰야만 끝나는 일이었다. 비로소 당신은 달리기를 멈췄다.


  엉뚱한 곳에 머물며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하던 어느 날 밤, 당신은 불현듯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켰다. 불빛 사이로 가다랑어포 같은 먼지가 꿈틀댔다. 어디선가 늦바람이 불어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던 당신 안의 무언가를 깨웠다. 오래간만이지만 낯익은 느낌. 당신은 몸을 일으켜 침대 밑의 공간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안에 오래 묵혀 있던 종이 상자 하나를 꺼냈다. 동작 하나하나에 어색함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기억한다는 느낌이었다.

  상자 속엔 익숙한 모양의 수첩과 펜이 잠들어 있었다. 지나온 시간만큼 낡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것이기도 했다. 당신은 그것을 꺼내어 비어 있는 공간을 펼쳤다. 그리고 밤의 공허 속에 홀린 듯 적어 보았다.


  당신은 그날의 파도를 기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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