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필터가 가리지 못한 기억
아스라한 기억 속 잔영
어둠을 더듬으며 써 내린 소소한 필적
스스로 진지했던 나날
지난날의 꿈, 그 이야기의 복원
그때부터다. 그곳에서 긴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당신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이국적 풍경도 한동안 “와아!”하며 탄성을 지르고 나니 그만이었다. 가져온 읽을거리라곤 분위기 파악 못하는 가이드북과 로맨스 소설. 그걸로 침낭 주윌 맴도는 모기를 잡을 뿐이었다. 외로운 행성 아래 불륜 이야기라니, 그 사이에 깔린 모기처럼 당신도 아무렇게나 웅크려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덜컹거리는 기차가 자꾸만 당신에게 말을 걸었다.
“덜컹 덜컹(잠들면 안 돼)…….”
덕분에 잠을 포기하고 천장의 선풍기를 바라보는데, 문득 이럴 때 쓸 만한 물건을 가져왔다는 게 생각났다. 당신은 보부상의 등짐 같은 배낭을 뒤져 수첩과 그 갈피에 꽂아 둔 펜을 찾아냈다.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당신은 수첩을 펼치고 카메라의 셔터처럼 볼펜심을 눌렀다. 그리고 날짜나 장소 따위의 단순한 기록부터 그때그때의 느낌이나 감상을 두서없이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두워지자 손전등을 켰고 손전등마저 켤 수 없으면 어둠 속을 더듬어 썼다. 기차 안이 심하게 흔들려 글씨가 자꾸 빗나갔음에도 당신은 계속 무언가를 써나갔다. 처음엔 흔들리지 않으려고 힘을 주었지만, 이내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쓸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꼭 제대로일 필욘 없어. 딱히 쓸 게 없어도 날짜나 날씨, 머물렀던 장소를 기록하면 그만이야. 윗줄엔 그날 밥값을 적다가, 바로 다음 줄엔 꿈, 사랑, 추억, 그리움 따위를 읊어도 돼.’
당신의 수첩 속은 곧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이 한데 모인 요지경이 되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게 당신의 천성인 듯했다.
이후로 수첩과 펜을 늘 곁에 두었다. 여행 내내 그러했고, 여행을 마치고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곳을 떠나자 더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곳이 아닌 곳에선 좀처럼 글을 채워나갈 수 없었다. 수첩과 펜이 무겁게 느껴졌다. 쓰지 못하니 그건 짐일 뿐이었다. 그만 놓아야 했다.
당신은 그것을 종이 상자에 담아 방 한구석에 넣어두었다. 해갈할 수 없는 욕망은 봉인해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다만 소망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다시 꺼내기를,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