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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결 Oct 11. 2021

흐린 가을 하늘에 땅콩을 캐!

무르익는 가을, 수확의 기쁨을 느끼다

지난봄, 땅콩 일곱 알을 심은 게 싹을 틔워 여름 내 작달막한 나무처럼 자라 땅에 줄을 내리더니 땅 속에 주렁주렁 땅콩을 길러냈다. 정말 신기해!

멘토님이 땅콩 캐는 재미가 있다며 심어 보라며 주신 우도 땅콩.

심으려고 받은 땅콩 알들이 토실토실 먹어도 맛있겠다 싶었지만 땅에게 양보했더니 땅이 품어서 이렇게 많은 열매를 맺었다!


첫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해야 한대서 며칠 전에 수확했다.  

나무 멱살을 잡고 줄다리기하듯 잡아당겼더니

토실토실 땅콩들이 우르르 딸려 나왔다.

어린 왕자에게 자기 별에 사는 장미가 하나뿐인 특별한 장미이듯, 요 땅콩들은 시장에서 돈 주고 사 먹는 거랑 다르다. '우쭈쭈 내 새끼들~' 이니까.


작물도 심는다고 절로 크는 게 아니다.

이 작물이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어떤 보살핌이 필요한지 공부하고 때마다 적절히 돌봐줘야 한다.


우리 땅콩은요...

처음에 과연 얘가 싹을 틔울까 의심스러웠지만 1~2주 기다리자 싹이 빼꼼 올라왔다.

얼마나 반갑고 귀엽고 기특했는지.

새싹이 나왔을 때 땅콩과 비슷하게 생긴 잡초가 주변에 같이 났다. 잡초는 줄기 쪽이 빨갰다.

땅콩 새싹 반경 안에 있는 풀들은 다 뽑아서 메주고 잡풀이 자라지 않게 덮어줬다.

실수로 잡풀인 줄 알고 작물 새싹을 뽑으면... 정말 눈물 난다.

내가 몇 개 심었지? 어느 위치에 심었지? 생각해가면서 조심조심 작업해야 한다.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가지에서 기다란 줄이 동아줄처럼 아니 명주실처럼 내려온다.

이게 뭐지 했더니, 땅콩은 이렇게 줄이 땅에 박혀서 그 아이들이 자라는 거란다.

땅에 안 닿고 덜렁덜렁 대는 걸 보고 북을 줬다.

'북돋아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왔는데, 주변에 있는 흙을 끌어다가 덮어주는 거다.

줄이 내려왔을 때 제때 북을 줬더니 이렇게 다복하게 땅콩이 열린 것 같다.


잎에 검은 반점 같은 게 났는데 이제 수확해도 된다는 거란다.

더 놔두고 비 맞으면 싹이 난다는데... 며칠 전에 비가 와서 그런지 싹 틔운 게 두세 개 있었다.

그래도 비교적 손이 많이 가진 않은 무던한 아이.

땅콩 열매만 골라서 따내 집에 가져와서 물을 받아다가 여러 번 헹궈서 신문지에 널어놓고 베란다에 말렸다.

뭐 해 먹지? 그냥 살짝 프라이팬에 구워서 까먹어도 맛있겠지!

수확하고 나면 이걸로 뭐 해 먹지? 하는 생각에 즐겁다!

 


고구마의 성장일기

벅찬 수확의 기쁨을 준 두 번째 아이는 고구마!

두둑 만드는 것조차 어설펐던 때.

낑낑거리며 밭 가장자리에 세모로 얕고 좁은 두둑을 만들고 '더 넓고 평평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망연자실해 있었다. '고구마 심으면 딱이겠네'라는 멘토분들의 조언에 힘입어 열아홉 줄기를 쭈르륵 심었다.


줄기를 길가 쪽으로 향하게 잘못 심었는데,

잎이 얼마나 무성해지는지 길을 침범해서 옆 밭주인을 비롯해 지나다니는데 불편을 느낀 몇몇 분들께 핀잔도 들었다.


주인 잘못 만난 탓에 구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굳세게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난 아이들.

한 여름, 풀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정글 밭을 이룰 때, 고구마 줄기들도 무지막지하게 자랐다.


'제때 줄기를 솎아주고 북을 줘야 영양이 고구마로 가서 굵어진다는데...'

낫으로 풀을 몇 무더기씩 베고 손길이 시급한 아이들 신경 쓰다 보면 밭에서 2~3시간이 훌쩍 가버리고 나는 녹초가 되곤 했다.

새치 뽑듯 고구마 줄기 사이로 삐죽삐죽 자린 잡초만 뽑아주고는 '다음에! 다음에 돌봐줄게, 미안!' 솎아주는 걸 미뤘다.


이렇게 고구마를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날 잡아서 고구마 돌보기만 몰두한 게 두어 번. 북주기 나눠서 두 번, 고구마 줄기 따준 것은 두세 번 정도.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고구마 줄기를 따려고 보니 줄기가 호스처럼 엄청 길어져서 사이에 가지를 또 뻗고 뒤엉켜 있었다. 옆 두둑에 고추와 깻잎들 영역까지 침범해서 그쪽 길로는 가지도 못했다.

하... 진작 진작 따 줄걸. 그래도 이렇게라도 돌보게 되는 게 최선이었다.

그때도 한 번에 못하고 나눠서 했다.

엉킨 머리 하나씩 풀어주듯이 핵심 줄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어서 거기에 붙은 줄기를 수확했다.

끄트머리 꺾이는 부분에는 잎을 놔둬야 광합성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뒷부분에 자라난 줄기 중에 굵고 녹색을 띠는 게 싱싱하고 껍질 까기도 좋다고 한다.

통통해도 잎이 누렇고 줄기가 누런 건 먹을 수 없다고... 따서 가져갔다가 버렸다.

딴 뒤에도 제때 껍질을 까지 않으면 시들어서 까기가 힘들어진다. 물에 불리다가 다 물러져서 버리고 시행착오가 많았다.


손이 많이 가는 고구마 줄거리 다듬기.

시골에 계신 할머니 농사를 좀 도와드려 본 친구는 고구마 줄기 끝을 과도로 살짝 잘라서 껍질 부분이 남게 한담에 쓱 잡아당겨서 껍질을 벗겼다.

우리 할머니는 끝부분을 꺾어서 딸려오는 껍질을 한번 까고 가운데를 또 꺾어서 반대 부분 껍질을 벗겼다.

껍질을 까다보면 손이 검게 물들고 손이 많이 가도 고구마 줄거리 무침은 참 맛있다.

2주 뒤에 와보니 '나 언제 다듬은 적 있었어?^^' 하고 인사하듯 다시 무성해져 있었다...

고구마 줄기... 너란 녀석... 대단하다.


다음 주 최종 수확이라는데 두둑이 길기도 하고 고구마 무게가 꽤 나가니까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고구마를 일부 수확했다.

생각보다 깊이 있었는데 호미 날에 찍힐 수 있어서 호미등으로 살살 팠다.

심봤다! 보물찾기 하는 느낌이다.

내가 북도 많이 못주고 줄기도 많이 못 따준 것에 비해서 실하게 자라서 나타나 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유치원 때 체험학습으로 어느 고구마 밭에 가서 쭈그려 앉아 고구마 캤던 게 생각난다.

그땐 정말 영문도 모르고 캐고 신나서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과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난다.


고구마 줄거리는 무쳐진 나물 형태로만 어떻게 고구마랑 연결돼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예전에는 최종 수확물인 열매들 모습만 알았지 어떤 모습으로 자라는지 대충 상상할 뿐 잘 알지 못했다.

이렇게 키워보니 열매라는 코끼리 다리만 더듬다가 열매가 달린 작물 전체라는 온전한 코끼리를 볼 수 있도록 시야가 트인 느낌이다.

이렇게 왕초보 농부에게도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그저 심고 돌보는 것 정도지 내가 막 인위적으로 뭘 해서 억지로 키워내는 게 아니다 라는 걸 배웠다.

시기마다 적절한 돌봄과 관심, 영양을 주고 해가 되는 것들은 잡아주고 치워주고 사랑을 주고 제때 거두는 것.

농사뿐 아니라 생명을 길러내는 모든 일이 다 이런 이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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