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니 Mar 02. 2020

사무실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 미루어 짐작해보는 마음 


181126


포르투갈어 과외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이게 먼저지. 포르투갈어를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가 금방 관뒀다. 


최근에 스스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왔다 갔다 회사를 다니는 것 말고, 뭘 특별히 하고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냥 회사 열심히 다니면 되지 이렇게 뭔가 더 해야 하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스스로 조바심을 낸다. (아마 회사가 좀 다닐 만 한가보다.) 그래서 포르투갈어 과외를 받아보기로 한 거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충동적으로 SNS를 통해 과외 선생님을 구했다. 그리고 지난주 주말, 포르투갈어 과외 선생님을 만났다. 


나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나는 이제 달라질 것이다. 뭔가 결심만 하는 게 아니라,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무기력하게 있지 않을 것이다. 채찍 덕에 속도를 내서 선생님을 만나는 것 까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그러나 초반의 추진력에도 불구하고 과외는 하지 않게 되었다. 장소, 금액, 수업 방식 등의 조건을 맞추는 과정에서 파투가 났다. 그럼 다시 내 조건에 맞는 다른 선생님을 찾아보면 될 일인데, 나는 바로 흥미를 잃어버렸다. 과외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게는 목표도 원하는 것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목표가 없으니 조건에 맞는 선생님을 결정하는 게 되려 어려웠다. 


지금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지금의 나, 그대로는 왜 안 되는 거야? 왜 자꾸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결국 돌고 돈다. 회사에 대한, 아니 회사 안에서의 나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 퇴근 후를 분주하게 한다. 퇴근 후의 시간을 알차게 써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이 패턴, 처음이 아니다.


신입 사원이지만 사회생활은 처음이 아니라, 입사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금방 피로를 느껴버렸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또 말만 하고 말았다. 몇 주 전의 나와 그대로, 바뀐 것이 없다. 

 



181124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핸드폰을 열었는데 SNS 피드가 온통 첫눈 사진이다. 늦잠 덕분에 눈이 그친 뒤에야 사진 속에서 눈을 봤다. 자고 일어났더니 겨울이 와 있다. 요 며칠 춥다 춥다 하긴 했지만 아직 가을이라 생각했는데,  빼박. 이번 눈으로 겨울이 왔음을 공식 선언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여름도 그랬다. 올여름이 어떤 여름이었나.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지독한 무더위의 나날들이었다. 그 여름의 끝, 어느 하루 자고 일어났더니 금세 가을이 와 있어서 얼마나 어안이 벙벙했던지. 이런 것이 나에게는 참 중요하다. 계절이 변하고, 내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181127 


회사에 유자가 한 박스 배달됐다. 대표의 부모님께서 재배해서 보내신 거라고 했다. 여자 직원들끼리 대강 노나 가졌다. 남자 직원들은 유자에 관심도 없다. 퇴근하는 길 버스에 앉아 무릎에 가방과 유자가 담긴 검정 비닐봉지를 올렸다. 퇴근길이 내내 향기로웠다. 


유자가 어찌나 향기롭던지 




181130 


이전 사무실에서는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곳이 E의 자리였다. E는 사무실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한다. 원래는 경영 지원 업무, 회계, 인사관리를 맡았는데 (다정한 급여 명세서를 보내는 것도 E의 업무) 사무실 제일 입구에 앉았으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 응대도 하고, 택배도 받고. 택배를 받았으니 내용물 정리도 하고, 문 근처에 쓰레기통이 있으니 보기에 너무 지저분하면 쓰레기통 정리도 해놓는다. 하다 못해 시계 건전지도  E가 가는 걸 봤다. 나이는 가장 어린데 누구나 인정하는 믿음직한, 엄마 같은 직원이다. 좋게 말하면 그렇다.

 

지난 회식 때, L이 최종적으로 창업을 하는 게 목표라는 말을 하자, 누군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창업을 한다면 우리들 중 가장 함께 하고 싶은 동료는?” 그때 그 L은 고민 없이 E를 외쳤고,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아도 그래'의 의미. E는 사무실에서 그런 존재였다. 


그런가요,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말이죠 어머니...


어제 사무실 자리 이동이 있었다. 고민 끝에 E가 사무실 가장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리고 어찌어찌 밀리고 밀려 내가 출입문 근처에 앉게 되었다. 이제 보니 문 앞은 그런 곳이었다. 뭔가 그래도 될 만한 사람이 앉는 곳. 가장 연차가 오래되거나 중요한 일(이 말도 웃기다)을 하는 사람은, 배치 대상에 고려되지도 않았다. 이 자리가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싫을 것도 없다. 어디 앉아도 딱히 관계없고. 


별일 없이 새로운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일을 하고, 거의 퇴근 무렵 사무실에 손님이 들어왔다. 담당 직원이 나와서 손님을 맞으며, 자연스럽게 회의실로 들어갔다. 


손님이 왔다. 손님맞이를 해야 한다. 손님맞이는 누구의 일이지, 그동안 누가 했더라. 아 맞다, E. 그런데 E는 이제 손님 오는 걸 보지 못하는 자리에 앉아 있잖아. 손님이 온 건 나만 봤다는 건데, 그럼 내가 해야 하나. 아니 아니, 손님맞이는 내 일이 아니잖아. 그러면 누구 일이지. E에게 메신저로 ‘손님 오셨어요’라고 알려야 하는 건가. 이게 E의 업무가 맞나. 아냐 이거 이상한데. 다시 생각해보자. 


식간에 이런 생각들이 이어 지나갔다. 메신저를 열었다가 닫고, 일단 E의 자리로 갔다. 얼굴을 보고 말해야야겠어. 


“E, 손님이 오셨는데 메신저로 손님 왔어요,라고 말씀드릴까 하다가 그게 E의 일이 맞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요. 만약 E가 문 앞에 앉았다는 이유로 그동안 그런 일을 했던 거라면 앞으로는 그 자리에 앉은 제가 하는 게 맞는 걸까요. 그런데 그걸 문 앞에 앉은 사람이 하는 것도 좀 이상해요.” 


다다다다 내 할 말을 쏟아내는데, E가 말을 끊으며 일어났다. “우선 손님부터 챙기고요." 맞다. 바보. 탕비실로 따라 들어가 E와 함께 간식을 챙겼다. 


E가 회의실에 음료와 간식을 놓고 나왔다. 


원래 그 일이 자신의 업무는 아니라고 했다. 예전에 회의에서 분명 담당자 본인이 손님맞이를 하기로 했는데 잘 챙기지 못하는 동료들(주로 남직원들)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만, E가 알아서 챙겼던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말이지 난 입사하고 지금까지, 딱히 다른 동료가 자기 손님의 음료를 챙기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으니 유심히 보지 않은 거겠지만.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 생각했던 거겠지만. E가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곧 인턴 직원이 오시니까 앞으로는 그분께 시키기로 하고, 그동안은 N이 보게 되면 그때만 좀 챙겨주시면 어떨까요. 위치상 앞으로는 제가 챙길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맞다. 보이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하면 그만일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E의 부탁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근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턴이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E가 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걸 이 자리에서 우리가 상의해서, 되는대로 우리가 돌려가며 할 일은 아닌 거다. 단칼에 잘랐다.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지만... 전체 회의 때, 앞으로는 자기의 손님은 자기가 챙기는 걸로 다시 확실히 말하는 걸로 해요.” E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맞긴 맞는데..." 


평소부터 E가 너무 잡다한 일을 다 맡아서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E를 보면 이전 회사에서 사무실 전구를 갈아 끼우던 내가 생각났다. 오래 일했던 곳이라 그런지, 책임을 맡고 있는 자리라 그랬는지 내 눈에만 보이는 일들이 많았다. 그걸 누군가에게 나누고 함께 할 생각을 잘 못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냥, 내가 해버리는 게 편하고 빠르니까 그냥, 하기 싫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할 땐 억지로가 아니었지만 조금씩 불만은 쌓였다. 몇 번, 윗사람에게 불평 같은 건의를 해봐야 아래 직원들이 그리 많은데 일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는 것도 내 능력 부족 탓으로 화살이 되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일까, 매번 E를 보면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보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하면 뭐 어때서,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런데 보통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쉬운 일 무엇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부러 마음먹고 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 더 중요한 일을 하느라 못하는 걸 수도 있고 거기까지 미처 신경을 못 쓰는 걸 수도 있고. 그런데 이제 안다. 신경을 안 쓸 수 있는 것도 권력이다. 모를 수 있는 게 권력이다. 나도 신입사원이라는 권력을 가지고 '아직까진 내가 신경 쓸 일 아니야'라며 넘길 수 있는 데까지는 그냥 넘겨 왔던 것처럼. 누구 하나 '나는 절대 하기 싫어, 그 일은 E나 시켜'라고 할 동료는 없지만, 굳이 나서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 날이 있다. 얼마 전 E의 생일이었다. 기념일에 케이크를 챙기는 것도 E의 수많은 일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막상 E의 생일을 아무도 챙기지 않고 그냥 지나친 거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늦은 생일 축하를 했다. E에게서 또 내 모습이 겹친다. 지난 회사에서 생일 맞은 직원들의 케이크와 선물을 챙기는 건 내 몫이었으니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내 생일이 돌아오면 고민이 됐다. 내 케이크와 내 선물을 내가 사긴 싫은데, 그렇다고 누군가 나서서 챙기는 사람도 없으니 민망한 상황이 너무 싫었다. 그냥 제발 아무도 알아차리지 않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결국 언젠가 누군가가 알게 돼서 날이 지나 늦은 생일 축하를 하는 것만큼 뻘쭘한 일도 없으니 차라리 누군가 기억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이런 소모적인 고민들 해본 적이 있어서, 그래서 내가 E에게 자주 마음이 가 닿는 거다. 마음대로 E의 입장을 지레짐작해버린다. 


다음 전체 회의 때, 자기 손님은 자기가 접대하자고 다시 한번 잘 말해보기로 했다. 지나치게 말이 많고 흥분했지만, 내 오지랖이 E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전달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좀 세련되게, 침착하게 내 의도를 전달하고 싶다. 사람이 참 세련이 늘질 않는다. 




181204


야근을 하는데 누가 스피커로 캐럴을 틀었다. 하루 종일 들썩였던 복잡한 마음과 감정들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별거 아닌데 참, 이게 캐럴의 힘이다. 그나저나 벌써 캐럴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야근인데도 뭔가 분위기 있는 기분 :) 




이전 19화 내일은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