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니 May 14. 2022

매듭을 짓는 일

"엄마 나 몇 시에 태어났어?"


점이니, 사주니, 그 흔한 타로도 본 적 없었다. 꽤 독실한 신앙이 있고, 굳이 내 과거니, 미래에 대해 남의 입을 빌어 듣고 싶다 느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이었다. 사주를 보기 위해 엄마에게 생시(生時)를 직접 물어본 것이.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냐고 되물으며 엄마에게서 사진이 한 장 도착했다.




6월 21일 / 새벽 1시 45분 출생 / 체중 : 3.4kg

그동안 수술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었는데 잠시 몇 시간 동안 고통이 지난 후 순산했다. 앙 우는 소리와 함께 간호원들의 태도를 보니 또 딸이다. 딸이라 좀 서운하긴 하지만 건강한 아기 순산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먼저 드렸다.




엄마의 육아 일기 속, 한 페이지였다.


친한 친구가 사주명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MBTI 성격유형 검사로 강의를 하는 친구는 타고난 성향에 관해 공부하고 말하다 보니 자연스레 동양의 사주명리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주명리는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 생시의 간지팔자, 그야말로 진짜 타고난 것만으로 선천운과 후천운을 감정 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무속이나 어떤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학문으로 공부한다는 말에 굳이 반감 같은게 생기지 않았다. 물론 친구가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굳이 사주를 보겠다고 내 생시를 전달하지 않았겠지만.


친구가 말해주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MBTI 강사가 친한 친구라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나의 성향 그 자체를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싫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사람의 성격 유형에 관해 공부하다 보니 친구는 점점 더 사람에 대해 깊어졌다. 원체 '나'에 관심이 많은 나는, 친구와 ‘나’에 대해 세세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 친구가 사주명리 공부를 시작했고 내 사주를 봐주겠다고 하니 별 거리낌 없이 바짝 다가 앉을 수 밖에.

낯을 가리지 않고 활발한 사람을 보고 "딱 봐도 E(외향성)같아"라거나, 무언가 시작할 때 먼저 계획을 세우는 사람에게 "너 J(판단형)지?" 물어보듯, 사주명리학에도 그런 비슷한 뭔가가 있나 보다. 내 생시를 들은 친구가 한자로 뭔가 써 내려가면서 연신 말했다. "역시", "그치. 그럴 줄 알았어." 마침내 친구가 볼펜을 탁 내려놓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 남편 복 없을 것 같지 않댔지. 사주에 관이 두 개나 있어. 그것도 편관이 아니라 정관이야. 관심만 있으면 결혼을 안 할 리 없다니까." 편관이니 정관이니,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아까 사주를 봐준다는 친구에게 농담처럼 말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사주에 분명 남자는 없을 거라고.' 필요 이상 진지한 표정으로 듣더니만 그것부터 확인을 했나보다. 혼자 글자들을 들여다보며 추임새 같은 말을 하던 친구가, 나는 봐도 모르는 종이를 눈 앞으로 쓱 들이 밀었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원을 그리고 있고 그 주변에 글자들이 붙어 있었다. 해석이 필요했다. "사람 복이 많은 것도 타고 난 거야." 가물거리는 기억 덕에 친구의 말을 뉘앙스만 옮겨보자면. 엄마 역할을 하듯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 주변에 늘 끊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인복이 많다는 말은 꽤 자주 들어서 때론 스스로의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으니까. 직장, 단체 같은데 속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다. 또 고개를 끄덕였다. 끊이지 않고 직장을 다녔다. 퇴사를 하고 다시 신입 사원이 되기를 반복했다. 조금 다르게 살고 싶어 상주에 내려와서도 내내 회사에 속해 있었다. 모임에 속하거나 모임을 만드는 것도 잘 이어가는 편이었다. 그 뒤로도 이것저것 무척 많이 말해줬는데...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사실 다음의 말이었다.


내 사주에는 재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
손으로 가리키는 '재'의 자리에는 재물재財가 쓰여 있었다. 보자마자 '사주팔자라는 것이 정말 이렇게 정확할 일인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평생 돈에 관해서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느낌이었다. 단순히 돈이 있다 없다, 많다 적다를 떠나 전혀 관리를 못 하고 무엇보다 관심이 가질 않았다. 남들이 주식이니 코인이니, 것도 아니면 펀드니, 재태크니 이야기 하는 것이 마치 제 3세계 외국어 같다고 느끼곤 했다. 스스로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거라 생각했는데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난거라니? 나의 과거가 주르륵 스쳐가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멋대로 뻗어나가는 나의 해석을 끊고 친구가 풀이를 시작했다. 재성이라는 건 단순히 재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말하는 소위 일의 영역도 포함된다고 했다. 특히 일에서 목표를 세우고 마무리를 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그러면서 네가 그동안 해온 고민과 맞닿아 있지 않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오랫동안 '유능함'이 뭘까 질문을 던져왔다. 스스로 유능하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자기가 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슬쩍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누군 뭐 열심히 안 하나. 꼭 자기들만 일하는 것처럼' 삐딱한 시선으로 흘겨보거나, 시기심 같은 곱지 않은 마음으로 튄 적도 있었다. 성실하기도 하고 탁월한 면도 있는 것 같은데 만족할 만큼 유능하지 못하다고 느끼곤 했다. 이건 단순히 주변에서 "아냐, 너 잘해", "너 능력 있어" 같은 말을 듣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패의 경험보다 좋은 성과를 경험한 적이 많았지만 그걸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이라는 게 어느새 야금야금 내 인생의 대부분을 잠식해버린 뒤, 이 질문은 생각보다도 더 자주 나를 괴롭혔다. 답을 찾기 위해 주변의 유능해 보이는 사람들을 살폈다. 나와 다른 한 끗 차가 뭘까 궁금했다. 결과는 아니었다. 꾸준함도 아니었다. 그럼 집요함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그렇게 스스로 질문과 답을 던지고 있던 차였다. 근데 친구가 말해온 것이다. '목표와 끝맺음'이라고.


리터럴리,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일을 펼치는 데는 선수, 그걸 잘 쫌매서 마무리 짓는 건... 일단 안중에 없었다. 어, 맞잖아 나. 결과는 좋았더라도 과정에서 나만 아는 뒷심 부족이 있었다. 다른 시작에 기웃거리느라 어느 순간 흥미를 잃고 슬쩍 힘을 빼버렸다.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큼 책임을 지고 싶었다. 끝의 끝까지 매듭을 짓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니 일에 대해 자신감이 생길 리 없었다. 의외의 대화에서 해답을 발견한 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마무리한다는 게 어떤 걸까. 평생 안중에도 없던 질문이라 답을 하기 조금 막막해졌다. 반짝이는 것에 반응하고 달려드는거라면 자신있는데, 흥미롭지 않은 것을 붙잡고 있는 건 막연했다. 답을 찾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고 뭐든 조금씩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그 사이 스스로 만든 몇 가지 방법이 생겼다. 일단 가능하다면 하나의 일이 끝난 뒤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 그 다음은 의식적으로 계속 '마무리'를 생각할 것. 긴장감이나 조바심 같은 감정을 인정하기로 했다. 끝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건 때론 결과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기도, 때로는 다른 일에 대한 조급함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단 가장 사소한 매일 하루를 잘 매듭짓기로 했다. 항상 침대에 누워 책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불을 켜고 안경을 쓴 채로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대체 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 잠들기 전 하루 마무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달까.

얼마 전부터 시간을 들여 하루를 매듭짓고 있다. 씻고 나와서 머리를 끝까지 말리고(이것도 나에게 어려운 일이다) 잠깐 책상에 앉아 해야 할 일을 했는지 미룬 건 없는지, 내일 해야 할 일이 있는지 간단히 체크하고 기록하고, 책을 읽다가 또는 드라마를 보다가 등에 고여 놓았던 베개를 다시 평평하게 눕히고 안경을 벗고 머리맡의 조명을 끄고 일자로 누워 잠에 든다. 사주팔자를 믿는 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으로 이 행위 자체가 나를 달라지게 할 거라 믿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이 일상을 바꾼단 내용의 책이 유행했던 적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도했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간 이들은 일상이 바뀌었다고 했다. 단순히 그 행위가 아니라 의지가 그들의 일상을 바꾼거다. 필살기나 신비한 비법이라서가 아니라 일상을 바꾸고 싶다는, 더 나아지고 싶다는 의지가 그걸 해낸 거라 믿는다. 오늘, 잠들기 전의 하루를 마무리 하는 사소한 행동들이 내일의 나를 유능함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믿고 있다. 진심으로 믿고 있다.          


글자들을 들여다보며 "그치? 맞지?" 추임새를 넣던 친구가, 봐도 모르는 종이를 내 앞쪽으로 쓱 밀었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원을 그리고 있고 그 주변에 글자들이 붙어 있었다. 해석이 필요했다. "사람 복이 많은 것도 타고 난 거야." 이렇게 글로 옮길 줄 알았으면 잘 기억하려고 애썼어야 하는데 사실 이미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들은 뉘앙스대로 친구의 말을 옮겨보자면, 엄마 역할을 하듯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 주변에 늘 끊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인복이 많다는 말은 자주 들어서 때론 스스로 해낸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으니까. 직장, 단체 같은데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다. 또 고개를 끄덕였다. 끊이지 않고 직장을 다녔다. 모임에 속하거나 모임을 만드는 것도 좀처럼 끊기지 않고 잘 이어지는 편이었다. 그 뒤로도 이것저것 좋은 말을 무척 많이 해줬는데...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건 사실 다음의 말이었다.

내 사주에는 '재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 '재'의 자리에는 재물재財를 쓴다고 했다. 보자마자 '사주팔자라는 것이 정말 이렇게 정확할 일인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평생 돈에 관해서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느낌이었달까. 단순히 돈이 있다. 없다, 많다 적다를 떠나서 가까이해본 적이 없었다. 관리도 못 하고 무엇보다 관심도 가지 않았다. 남들이 다 주식이니 코인이니, 하다못해 펀드니, 재태크니 이야기 하는 것이 마치 제 3세계 외국어 같이, 멀게 느껴졌다. 그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거라 생각했는데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난 거란다. 나의 과거가 주르륵 스쳐 가며 어쨌든 이것도 수긍이 갔다. 시키지도 않은 해석을 스스로 하는 나를 보더니 친구가 풀이를 시작했다. 재성이라는 건 단순히 재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일에서 목표를 세우고 마무리를 하는 것도 연관 있는 거라고. 파바박. 뚤려 있던 부분에 퍼즐이 맞춰졌다. 내가 그동안 해온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오랫동안 '유능함'이 뭘까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 유능하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자기가 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슬쩍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누군 뭐 열심히 안 하나. 꼭 자기들만 일하는 것처럼.' 삐딱한 시선으로 흘겨보거나 시기심 같은 곱지 않은 마음으로 튄 적도 있었다. 성실하기도 하고 탁월한 면도 있는 것 같은데 스스로 만족할 만큼은 유능하지 못하다고 느끼곤 했다. 이건 단순히 주변에서 "아냐, 너 잘해", "너 능력 있어" 같은 말을 듣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패의 경험보다 좋은 성과를 경험한 적이 훨씬 많았지만, 그걸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이라는 게 어느새 야금야금 내 인생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이 질문은 생각보다도 더 자주 나를 괴롭혔다. 답을 찾기 위해 주변의 유능해 보이는 사람들을 살폈다. 나와 다른 그 한 끗 차가 뭘까 궁금했다. 결과도 아니었다. 꾸준함도 아니었다. 그럼 집요함일까, 책임감일까. 그렇게 스스로 질문과 답을 던지고 있던 차였다. 근데 친구가 말해온 것이다. '마무리'라고.

리터럴리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사주팔자 풀이가 너무 정확한 데서 오는 소름 같은 게 아니라 끙끙 앓던 숙제의 답을 찾은 것 같이 시원함이었다. 일을 펼치는 데는 선수, 그걸 잘 쫌매서 마무리 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어 맞잖아 나. 결과는 좋았더라도 과정에서 나만 아는 뒷심 부족이 있었다. 다른 시작에 기웃거리느라 끝에는 자주 슬쩍 힘을 빼버렸다. 매듭까지 짓고 끝내는 다른 사람들과 자꾸 비교하게 되니 자신감이 생길 리 없었다.

의외의 대화에서 답을 얻었다. 다음 질문이 자연히 떠올랐다. 마무리한다는 게 어떤 걸까. 평생 안중에도 없던 것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막막해졌지만, 또 답을 찾기 위해 숱한 질문들 던지고 뭔가 시도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능하다면 하나의 일이 끝난 뒤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다음은 의식적으로 '마무리'를 생각할 것. 세 번째는 긴장감이나 조바심을... 인정하기로 했다. 끝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건 때론 결과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기도, 때로는 다른 일에 대한 조급함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일단 매일 하루를 잘 마무리 하기로 했다. 대단한 건 아니다. 잠깐이라도 하루 동안 해야 할 일들이나 했던 일들을 정리한 뒤, 불을 끄고 안경을 벗고 반듯하게 누워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항상 침대에 누워 책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불을 켠 채로 안경을 쓴 채로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대체 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마무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달까.

얼마 전부터 시간을 들여 하루를 매듭짓고 있다. 씻고 나와서 머리를 끝까지 말리고(이것도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잠깐 책상에 앉아 해야 할 일을 했는지 미룬 건 없는지, 내일 해야 할 일이 있는지 간단히 체크하고, 책을 읽다가 또는 드라마를 보다가 등에 고여놓았던 베개를 다시 평평하게 누이고 안경을 벗고 머리맡의 조명을 끄고, 일자로 눕거나 왼쪽으로 웅크리고 누워 잠에 든다. 사주팔자를 믿는 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으로 이 행위 자체가 나를 달라지게 할 거라 믿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이 일상을 바꾼다는 글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도했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간 이들의 의지가 그들의 일상을 바꿨다. 필살기나 신비한 비법이라서가 아니라 일상을 바꾸고 더 나아지고 싶다는 의지가 그걸 해낸 거다. 잠들기 전의 사소한 행동들이 나를 '유능함'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믿게 되었다. 진심으로 믿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