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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민희 Jan 03. 2022

맥주 자전거 탄 풍경

5/24 BrewCycle

@BrewCycle facebook

맥주 자전거.

단어만 봤을 땐 어떤 건지 감이 잘 안 오지만, 설레는 조합인 건 확실하다.


미국에서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가장 많다는 명성에 맞게 포틀랜드에는 Brew Cycle이라는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역 브루어리를 돌아보는 .    옥토버페스트 참여를 위해 갔던 뮌헨에서 맥주 자전거 예약을 실패했던 바람에 이날을 너무나도 기다렸다.


뮌헨의 맥주 자전거는 맥주를 마시면서 바퀴를 굴리는 반면, 포틀랜드의 Brew Cycle은 자전거로 브루어리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또 다른 브루어리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무지개떡처럼 일곱 색깔이 한 층씩 곱게 올라간 니트를 입은 마스터 언니는 무척 유쾌했다. 큰 입과 호탕한 미소는 낯가림 끝판왕인 나의 경계심도 무너뜨렸다.


“이름, 출신 지역, 생애 첫 콘서트, 이 세 가지를 말합시다!”


마스터 언니가 자기소개를 해보자고 말하자마자 가장 까불까불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찬성했고,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네 번째 차례였던 나는 남들의 소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첫 콘서트 누구였지? god 오빠들이었나? 헛 근데 이 사람들은 god 모르잖아.... 저 사람은 브리트니스피어스라고? 헐... 나도 해외 가수를 말해야 하나? 엥 없는데..'


맥주를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도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도는 기분이 들었다.


하~이, 아엠 민희! 아엠 프롬 코리아, 앤드,,,,

마이 퍼스트 콘서트 이즈,,,, 코리안 싱어쓰 콘설트,,

쏘 유 돈 노 후 뎀,,,,,

(짝짝짝짝..)


아 지금 내가 미국에 있긴 하구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쫄 일도 아니었는데 왜 쭈글대면서 이야기 했는지 모르겠다. 내면 깊은 곳에 잠자던 쭈글미가 튀어나왔다.

쭈글미가 +30 되었습니다...


함께 페달을 밟을 열다섯 명의 멤버 중에는 커플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다. 소개가 끝나고, 오늘의 DJ를 할 사람을 뽑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고객 참여형 프로그램이었다. 신선했다. 뉴욕에서 온 금발의 언니가 본인의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하기로 했다. 출발하자마자 꽤 많은 비가 내렸는데 여기 맞춰 신나는 노래를 틀어준 덕분에 워터밤 같은 페스티벌에 온 것만 같았다.


안장 높이를 올리는 롱다리 선생님..

열심히 페달을 굴리려는데 이런. 두 번째 난관에 마주쳤다.

다리가 짧아서 페달에 안 닿는다. 미국에 있다는 실감이 드는 순간(2). 나중에 내려서 안장을 조절해봤는데, 음. 최대로 내려가 있던 거였다. 페달을 안 밟자니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궁둥이를 들고 일어서서 힘겹게 페달을 밟았다.

쭈굴미 +10.



1. Lucky Labrador Brew Pub

첫 브루어리는 강아지 래브라도를 콘셉트로 꾸며둔 Lucky Labrador Brew Pub이었다. 맥주 메뉴도 전부 강아지와 관련된 이름이었고, 펍 여기저기 래브라도가 그려져 있었다. 킬링 포인트는 강아지는 출입할 수 없다는 것.


NO DOG INSIDE. 강아지 친화적인 포틀랜드에서 만난 문구여서 그런지 뭔가 넌센스 같았다.


여태 방문했던 포틀랜드의 여러 브루어리 중에 처음으로 홉 끓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꾸릿한 그 냄새가 확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마치 비 오는 날 쌀국수집을 지나가다가 육수 끓는 냄새에 홀린 듯이 가게로 발길을 돌리게 되는 것처럼!


남들 오기 전에 호다닥 찍은 기념샷. 안 보이지만 안장 끝에 걸터 앉아 있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자 다들 벌건 얼굴을 한 채 자전거 앞으로 모였다. 서로 썩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어색함도 줄어들었다. 역시 술이 최고다.

쭈굴미 -15.


술은 내 쭈굴미를 감춰준다.

이건 낯가림 끝판왕인 내가 술을 좋아하는 (수많은)이유 중 하나이다.


포틀랜드에서 자전거를 타려면 방향 전환을 할 때마다 손을 들어야 하는 게 매너라고 한다. Brew Cycle을 타는 라이더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탄 자전거(?)는 좀 요란하게 생기긴 했지만, 좌회전을 할 때면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우회전을 하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손을 들어 뒷 차에게 방향을 표시했다. 뻘쭘하게 손을 들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물론 나 포함), 나중에는 취기를 빌려 마스터가 시키지도 않아도 환호성을 지르며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물론 나 포함).



2. Schilling Cider House

50종의 사이더가 있다

두 번째 브루어리는 나랑 친구가 가장 기대했던 Schilling Cider House.

Brew Cycle에는 여러 코스가 있다. 야외 테라스에서 맥주 마시면 너무 좋겠다며 일부러 이 브루어리가 있는 코스를 선택했는데! 비가 더 많이 오는 바람에 야외 테라스 자리는 물 건너 갔다. 게다가 맥줏집이 아닌 사이더하우스였다. 오마이갓.


50가지 중 어떤 맛을 시켜야 할지 몰라 여섯 가지를 고를 수 있는 샘플러를 시켰다. 전부 홍초 맛이 났다. 덜 단 홍초, 꿀 맛 나는 홍초, 꽃 향기 나는 홍초...

개중에 한두 개는 나쁘지 않았지만, 사이더는 정말 내 스타일이 아녔다. 힙한 가게에서 힙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못 즐기는 느낌. 쭈글대면서 홀짝였다.

쭈글미 +10.


한국에서 예전보다 사우어 비어나 사이더를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이것들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찐' 맥주 덕후로 불리곤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맥주 모르는 사람이 될 거다.



3. Loyal Legion

세 번째 브루어리에 다다르니 열다섯 명의 텐션이 최고조를 찍었다. 조용한 공장 골목에서 시끄럽게 쿵짝 대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갔다. 알코올이 올라와서 그런지 세 번째 브루어리에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그저 신이 날 뿐-!

쭈글미 -50.


다리가 짧은 쭈구리는 쭈글미를 떨어뜨려주는 맥주를 더 사랑하게 됐다.


직접 창고에 넣어두어야 한다

처음에 만났던 장소에 도착해 사진 몇 장 찍고 바이크 체험은 끝이 났다. 처음에 예약할 때는 왜 다운타운과 떨어진 곳에서 하는지 궁금했다. 참여해보니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신나게 즐기려면 아무래도 다운타운은 무리였을 것 같다.

폐공장을 개조한 가게가 많은 이 지역도 현지 친구의 말로는 다운타운 못지 않게 개발되는 중이라고 한다. 참고로 포틀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한 도시 중 하나이다. 그럼 Brew Cycle은 계속 운영될 수 있을까? 한때 을지로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그런지 괜히 이런 심오한 생각도 잠깐 해봤다. 오후 내 맥주에 취해 있던 이방인은 금세 잊고 저녁 먹으면서 또 맥주를 마셨다.


매번 언급하지만, 포틀랜드는 정말 맥주 천국이야!



5월 24일에 마신 맥주 기록

SUPERDOG IPA(왼쪽)

Lucky Labrador Brewing Company / IPA-American / 6.5%

여태 먹어본 IPA와 다르게 끝맛이 청량하다. 쓰면서 깔끔해서 신기하다! 비가 많이 와서 오늘의 수프 시켰는데,, 크리미한 수프가 아닌 맵고 묽은 인도 숲이 나왔다 ㅎ 그래도 따뜻해서 좋았다 ㅎㅅㅎ


Schilling Cider House

진짜 맙소사다.. 사이더만 파는 곳이 있다니.... 샘플러 시켰다. 순서대로,

- Blackberry Pear(Schilling)

- Pineapple Apricot(Portland Cider)

- Watermelon(Anthem)

- Rose Vacay(Schilling)

- Hood River(Double Mountain)

- Champagne Imperial

다 새콤해서 기억이 잘 안 난다 ㅋㅋㅋㅋ HoodRiver가 가장 달콤하면서(꿀 맛) 덜 셔서 내 스타일! 수박은 풀맛;; 장미는 약간 은은한 장미맛 나서 신기~


3 Sunriver / LL collab. The Kessel Run IPA (이름 진짜 길다. 사진 앞 쪽 맥주)

Loyal Legion / IPA-American / 7%

Sunriver라는 브루어리와 Loyal Legion이 컬래버레이션한 맥주여서 골랐다. 특이하진 않았는데 약간 취하기도 해서 맛이 기억 안 난다 ^ㅅ^ 그래도 텁텁하지 않은 IPA라 마음에 들었다. 이름의 3은 탭 넘버인 거 같다.



Helles Lager

Rosenstadt Brewery / Lager - Helles / 5.3%

이미 맥주 너무 먹었는데 스테이크 먹는데 맥주 없이 먹을 순 없잖아 ㅋㅋ 그래서 시킨 라거. 가벼운 맥주 중에 오리건에서 만든 거라 시켰다. 독일 맥주처럼 시원하게 잘 마셨다.



(+)

2019 Estate Pinot Noir Rosé

Mt Hood Winery

다음 날 친구가 캐나다로 떠나야 하는 친구를 위한 와인파티^.^

리빙 포인트: 맥주를 질릴만큼 마셨다면 와인을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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