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살날수록 당신은 더 강해질테니까요
회사 총무부서에 근무했던 때의 일이다.
갓 대리 직함을 달았던 시절, 온갖 잡다한 경영지원 업무에 어느정도 이골이 난 중견사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 행사업무’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사원 체육대회, 유명인사 사내 강연, 생일자 깜짝 이벤트 등과 함께 CEO와 각 본부 임원을 대상으로 하는 ‘경영진 단합대회’도 내 손으로 피워내야했기 때문이다.
임원진들은 가을이 되면 지리산 봉우리 중 하나를 등정하고 막걸리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었고, 그해 역시 특정 봉우리를 CEO가 지목했다.
노고단, 천왕봉처럼 잘 알려진 봉우리가 아니었기에 등정 계획을 짜는 데 제법 애를 먹었다.
산악회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샅샅이 포털 검색을 했지만 해당 봉우리 등정에 대한 짤막한 후기만이 나올 뿐 도무지 등산 코스 안내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었다.
아차, 전국 방방곡곡 등산화 자국을 안찍은 곳이 없다는 회사 산악회 회장이 있지 않던가!
그 길로 현장에 내려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보에 동호회 입단 홍보기사도 짤막하게 실어주겠다는 호언을 남기며.
다행이었다. 쉬는 날 산 타는 재미로 산다는 산악회장에게는 없는 정보가 없었다.
해당 봉우리는 특히 알려지지 않은 갈림길이 많은 데다 길을 잘 못 탈 경우 봉우리가 아닌 절벽 쪽으로 오르게 되므로 조심해야 된다고 당부하셨다.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을 택하는 법을 대강의 지도를 그려가며 설명해주셨고, 난 그 지도를 소중하게 파일철에 넣어 답사를 오르게 되었다.
신입사원 시절 사내 산악 동호회 활동을 하다 연애사업이 바빠 탈퇴했다는 옆 팀 후배와 함께.
등산 초반에는 제법 안내지도가 잘되어 있어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고, 경사도 급하지 않아 50대 중후반의 임원들도 무리 없이 산을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드디어 마주친 몇 번의 갈림길을 잘 헤쳐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오르다 보니 사람의 인적이 없는 숲에 당도하게 되었다.
풀은 작은 나무 수준으로 마구 자라있었고, 어찌나 숲이 깊은지 한낮이었음에도 한기가 서릴 정도로 어둑어둑했다.
일단 위로 올라보자.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든 산 정상에 도달할 테고, 거기서부터는 사람의 발길을 따라 내려오면 될 거라 생각했다.
중간중간 거미줄로 가득한 계곡을 마주하기도 했고, 아치형으로 바위가 엇낑겨 있어 마치 동굴처럼 느껴지는 코스를 지나기도 했다.
산악회장이 산 중에서는 해가 빨리 떨어지니 오후 3시가 되면 지체하지 말고 일단 내려오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이미 시계는 4시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준비한 물과 간식도 바닥났고, 혹여나 멧돼지나 반달가슴곰을 만나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아뿔싸. 완전 망했다.
산악회장의 말이 맞았다. 우리가 끝끝내 당도한 곳은 산 정상이 아닌 절벽이었다.
엄밀히 절벽은 아니고 발디딜 곳이 칼날과 같다하여 공룡 칼바위라 불리는 아주 협소한 봉우리였다. 정말 엉덩이를 내려앉을 공간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내려갈 길이 요원한데 해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길 잃은 어린 초생은 이미 해가 떨어진 상황에서 야생짐승이라도 만날까 절박하게 걸음을 옮겨 가까스로 산을 탈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답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임원 단합회는 다가오고 출장내어 간 곳에서 아무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기에 난 당연히 주눅이 잔뜩 든채로 다음날 출근을 했다.
부서 회의가 열렸다. 단합회가 얼마남지 않았기에 주관부서는 마음이 분주할 수 밖에 없었다.
산타기에 능한 다른 직원을 뽑아 한시바삐 답사를 다시 다녀와야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엄연히 담당자는 나였고, 산악코스외 차량 대절, 간식 준비, 뒤풀이에 회사 복귀후 임원 퇴근차량 운행까지 모두 기획한 것은 나였는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지른 전과(?)가 있으니 고개를 떨구고 어떤 의견도 낼 수 없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고 난 누가 대신 가든 얼른 회의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갈림길이 워낙 헷갈리는 코스라고 나도 이야기를 듣긴 했어. 지금 조대리만큼 그 갈림길에서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누가 있어?”
생각지도 못한 논리였다. 하지만 묘하게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현장에 있었던 것도 바로 나였고, 잘못된 판단으로 길을 잘못 든 것도 나였다. 지금의 나라면 그 문제가 된 갈림길에서 확실히 다른 길을 선택해 갈 수 있을 터이고, 그러면 아무 이상없이 답사를 완료해 대회를 차질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확실하게 실패한 사람이 제일 확실하게 성공하는 방법을 아는 법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내게 주어졌고,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고 임무를 완성해 무탈히 단합행사를 치러낼 수 있었다.
실패의 경험은 곧 성공하는 방법에 대한 경험이다.
실리콘밸리의 구글,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인만큼 해고가 자유로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모두의 찬사를 받은 직원이 바로 다음 날 해고 통보를 받는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의 능력을 최대치로 뽑아먹었기에 회사 입장에서는 더 이상 고용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치열한 곳에서도 인사 시즌에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부류가 있다고 한다. 바로 거금이 투입된 프로젝트를 말아먹은 직원이다.
그 직원만큼 해당 프로젝트를 말아먹는 방법에 대해 빠싹하게 아는 사람이 그 회사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는 곧 차기 프로젝트의 최적의 적임자는 바로 그 망쳐먹은 직원이라는 논리에 합당성을 더하는 것이다. 대규모의 자금이 투입된 프로젝트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실패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정말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관점을 비틀어 경험을 쌓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누구보다 성공에 대한 방법을 잘 익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을 기획하고 추진해가는 분명한 주관과 뚝심은 실패의 경험에서 나온다.
실패를 하지 않은 자의 삶은 평온하다. 한 번도 도전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심심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고, 이따금 정전기 튀는 짜릿한 경험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음껏 실패해보자. 그리고 다시 도전해보자.
실패를 했다는 건 어쩌면 당신이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