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 고향 후배와 몇 명과 함께하는 단톡방에 달래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에 사는 친구가 마트에 가서 내 고향 태안 달래를 보고 반갑게 사진도 찍고 샀다고 한다. 셋이 주고받는 달래에 대한 대화. 역시 요즘 먹방 이야기가 대세인 만큼 달래로 하는 음식 이야기를 하였다. 달래간장을 만들어 계란 노른자와 함께하는 비빔밥을 거창하게 이야기를 하며 달래간장 비빔밥은 달래 된장찌개와 함께 먹으면 궁합이 잘 맞는다는 말고 마무리를 하였다. 이른 봄 입맛이 떨어질 때 즈음 달래간장 비빔밥은 입안에 군침이 절로 돌게 하는 별미인 것이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면서 동시에 내 코끝에는 달래의 은은한 매콤함이 코에 묻어나고 있다. 다시 달래 사진을 가만히 바라다보니, 지난 30여 년간 매해 겨울마다 우리 집안을 여기저기 진동하던 달래향이 코끝을 지나며,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우골탑이 아닌, 달래탑으로 컸다.
오래전 시골에서는 애써 키운 소를 팔아서 대학 등록금을 내는 것을 뜻하는 우골탑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소는 거액의 농가의 자본이자 자식 교육의 밑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겨우내 달래를 키워 팔아 내가 지금껏 먹고살고 있는 기술을 익히고 지금의 직업을 갖게 해 준 것이다. 나는 달래를 먹고 큰 것이 아니라, 달래를 키워 내다 팔 그 돈으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달래.
옛 노래에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이라는 노래구절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우리네 들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봄나물인 것이다. 마늘이 오래전부터 주된 밭작물이던 고향 마을에서 내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시작한 우리 집 주 수입원은 달래이다. 벼농사, 마늘, 콩, 고추 등등 이 있었지만 그중 제일의 수입원은 늦가을에서 초봄까지 이어지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달래이다.
한여름에 수확한 달래 씨, 종자를 비닐하우스에 키워 새파란 달래를 가지런히 한 묶음씩 묶고 씻어 상자에 담는다. 상자 안에 달래는 가락동 농수산시장으로 위탁판매를 한다. 한참 때는 하루에도 몇 상자씩 작업을 하여 위탁을 보내고 판매 후 입금되는 돈은 우리 집의 수입이 된 것이다. 달래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달래를 수확하여 상품화하여 판매까지 과정에서 어린 아들의 손길은 요긴하게 쓰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겨울 내 저녁이 되면 우리 집의 방안, 거실은 달래가 한가득 있었다. 낮에 밭에서 부모님이 거두어들인 달래를 커다란 포장에 담아 집에 가져온다.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거실에 앉아 온 가족이 모여 달래를 묶는다. 가지가지 흐트러진 달래보다 정갈하게 한 묶음씩 묶어 상품성을 높이는 과정이다. 말이 묶는다는 것이지 달래 한 뿌리, 한 가닦을 모두 모아서 가지런히 정렬하고 모으는 과정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한 손에 꼭 들어갈 정도의 크기의 묶음으로 고무줄로 조여 매는 과정이 끝이 아니다. 때로는 달래 잎의 초록색 끝 부분 일부가 노란색으로 변색이 되었을 경우에 이 끝부분을 일일이 떼어 네는 어려운 것까지 추가해야 한다. 이어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세척과정을 거쳐 흙을 털고 하얀 달래를 하나씩 상자에 차곡차곡 담는 과정을 거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초등학생의 손이지만 달래를 고무줄로 묶고, 변색한 노란 끝 잎을 떼어내고, 마지막으로 하얗게 먹음직스러운 달래를 상자에 담는 모든 과정을 초등학생 아들은 묵묵히 도왔다. 어린 초등학생인 나의 코끝에는 항상 은은한 매콤스러운 달래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기가 지금은 추억이 되어 달래를 상상하면 그 향기와 맛을 떠올리며 입 안 가득 침이 고이지만, 지난 시절 그 달래향기가 집안 가득 머금은 상황은 그리 좋지는 안 했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달래향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겨우내 적지 않은 현금이 우리 집의 통장에 꼭꼭 쌓인다는 것이다. 달래를 통한 푼돈이 모여 목돈이 되어 자식들의 교육 밑천, 고등학교부터 타지로 유학을 한 나의 등록금, 월세에 사용하였다.
지금도 고향에서는 달래농사를 하고 있다. 햇수로 넉넉히 30년 더 되는 기간 동안 이어지는 달래농사이다. 한 여름에 밭에서 달래의 씨가 되는 종자를 수확하여, 그 밑천으로 늦가을부터 겨울 내내, 초봄까지 비닐하우스에서 달래를 키우고, 수확하여 묶고, 씻고 담아서 출하를 하는 과정이 계속 이어진다. 자식들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우골탑의 심정으로 꼭 해야 하는 주 수입원의 역할에서 이제는 덜 절박한 심정의 부수입원으로 달래농사는 이어지고 있다. 내가 커서 자식을 낳고, 자식들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 되어보니 우골탑, 달래탑이라는 말이 몸소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자식들, 가족을 위해 나의 일터에서 일주일에 두어 차례 밤에도 일을 하고 있다. 비로 오래전처럼 은은한 매콤스러운 달래향을 맡으며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달래작업을 하는 나의 부모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이제야 그 오랜 시절 달래향이 집 안 밖으로 가득하며 한 겨울에도 자식들을 우골탑을 쌓는 심정으로 살아온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