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친해진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는 어쭙잖게 취미로 글을 조금 쓴다는 말한다. 아직 작가라는 말을 어디 가서 자신 있게 내밀기는 어렵지만, 만일, 혹시라도 이름표가 달린 작가가 된다면 필명을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아직은 그러기는 아주아주 멀었지만, 내 이름 세 글자를 내밀고 쓰는 것보다 필명이란 것을 하나 만들어 글을 쓰는 상상을 해본다. 이왕이면 어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멋진 신들의 이름을 쓰고 싶지만, 그쪽으로는 문외한이라서 내가 있는 주위에서 쉬운 말로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어느 날 옷장을 무심코 열다가 오래되고 녹슨 경첩이 덜렁 떨어져 버렸다. 수십 년간 문을 지지해 주고 고정해 주던 경첩이 힘을 닳아 떨어져 버린 것이다.
순간 ‘저것이다. 경첩!’ 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첩의 사전적 정의는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이다. 문이 달린 어느 곳에든 쓰이는 것이나 쉽게 눈에 뜨지 않고 잘 알지 못하기에 쉽게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경첩이다. 경첩은 나비경첩, 이지경첩, 숨은경첩 등 같은 역할을 하면서 위치와 종류가 다양하다. 하지만 모든 경첩은 눈에 잘 안 보이고 숨은 역할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갑자기 필명을 생각하면서 경첩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나 스스로가 지금 나와 같은 면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경첩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4년이면 졸업하는 대학 졸업장을 얻기 위해 6년간 대학을 다녔으며, 졸업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공인해 주는 면허증을 주는 시험에 합격하였다. 2004년 나는 내가 받은 면허증에 찍힌 번호는 나보다 이 면허를 받은 사람이 80,000여 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복지부에 주는 면허는 받는다는 것은 나의 평생 먹고 살 직업이 정해졌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8만여 명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최근에 본 인턴 선생님 후배의 면허번호는 14만 몇 번이라고 하였다) 이 있다면 그만큼 그들 중에도 다양한 인간들과 또다시 수많은 갈림길들이 있다. 그 많은 갈림길 중 나는 경첩 같은 역할을 하는 의사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외상외과라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외상외과, 외과 전문의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주로 남들 자는 시간, 남들이 쉬는 시간에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험한 일을 하는 도중에 다쳐서 오는 사람들이다. 여기저기 초록창에 본인들 병원 광고하는 수많은 의사를 가장한 사업가들처럼 번지름한 가운을 걸친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들과는 정반대 편에 있다.
모교 고등학교 멘토링 행사에 간 적이 있다. 인사를 잠시 나누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나보다 25년 어린 후배가 당돌하게 질문하였다.
"경첩 선배님, 왜 의사가 되었나요?"
"그런데 그 많은 과들 중에서 경첩 의사를 하고 계셔요?"
순간 무슨 대답을 할까 고민하다가, 내가 중학교 시절 써 놓은 글이 생각났다. ‘미래사회 질서는 내 손으로’라는 제목으로 법조인, 변호사를 꿈꿨던 글이다. 당시 나는 법을 잘 몰라 고생하는 사람들을 돕고 사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의 꿈은 ‘법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꿈에서, 법보다 아픔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여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꿈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말하고 의대에 진학하고, 주저리주저리 과정을 의사 면허를 받아 의사가 되었고 지금은 경첩 의사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주저리 말하는 도중에 내가 왜 경첩 의사가 되었는지를 나 스스로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럼 경첩이라는 것은 무엇인지요?
경첩은 영문으로 힌지(hinge)라고 한다. 힌지라는 말은 영어 단어보다 최근 힌지라는 핸드폰 부품은 최근 폴더블폰이 새롭게 나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힌지는 과거 피처폰에서 화면 부위와 버튼 부위를 나누어진 것을 연결하는 핵심부품을 말한다. 스마트폰이 본격화되기 10여 년 전, 피처폰에는 힌지 부품이 주요 부품이었으나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어 힌지 부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하나둘씩 다들 쓰러져 갔다. 그 와중에 한두 개 살아남고 버틴 업체들이 이제는 폴더블폰이 나온 뒤로 다시 힌지 부품을 중심으로 다시 재도약하는 성장을 하게 되었다.
경첩이란 우리 생활에 없는 곳이 없는 부품이다. 아주 작게 티가 안 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문을 어렵게 지탱하는 경첩까지 아주 다양하다. 쉽게 말해 문이 있는 모든 곳에 있는 것이 경첩이다. 문을 넘어서 우리 몸과 바로 붙어서 사는 핸드폰에도 중요한 부품이 경첩인 것이다.
2.
나의 어린 시절 뛰어놀고 살던 곳은 집 앞으로 논과 밭, 그리고 저기 산이 있는 시골 마을이다. 여름밤이면 사람들, 차 소리보다 개구리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시골이다. 시골 농사짓는 집에 아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손아귀에 낫을 잡을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집안 일과 농사일을 한 축을 맞게 된다. 처음에는 거드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어느 집에서는 아들이 없으면 농사일이 안 돌아가는 집들도 부지기수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주로 아빠, 엄마가 하는 일들을 옆에서 많이 도왔다. 일을 주도적으로 하기보다, 주어를 보조하는 보조사 역할을 하였다. 무거운 물건을 옆에서 거들어 들거나, 밭에 비닐을 씌울 때는 비닐 통을 들거나, 집안 문을 수리할 때도 마찬가지로 문을 들고 보조를 하였다. 나는 집안의 경첩 같은 역할을 하였다. 아마도 내가 계속 고향에 있고 손에 흙을 만지는 일을 하였다면 경첩 역할에서 앞문 쪽 역할로 바뀌어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건넛마을에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은 벌써 경운기를 몰고 힘도 훌쩍 세다고 은근슬쩍 자랑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언젠가 살짝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엄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러나 엄마는 시골 고향마을에서 경첩 역할보다 더 넓은 곳에서 아들의 경첩 역할을 내심 기대하셨다.
나는 17살에 유학(?), 집을 떠나기로 하였다. 정확히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길로 나는 농사짓는 집에서 경첩 역할은 그만두게 되었다. 이따금씩 성인이 되어서 가는 집에서 나는 열다섯 살에 자유자재로 잡았던 낫이 부담스럽고 어색하게 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경첩 역할을 준비하는 기간을 10여 년 가졌다. 고등학교 유학시절부터 시작하여 전문의라는 또 다른 국가자격을 얻고 국방의무까지 기간을 합하면 20년이 걸려서 내 이름을 내걸 수 있는 경첩이 되었다. 경첩의사가 된 것이다.
3.
지금은 여의도에 태권브이가 숨어있다는 건물로 출근하는 전직 검사가 쓴 책에서 검찰 조직에서 본인들 역할을 여객선을 꼭 쥐여주는 나사못으로 표현하였다. 나도 지금 커다란 배 구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사못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첩의사다. 커다란 배 위에 넓게 펼쳐서 나서는 돛대나 깃발이 아니라, 숨어서 꼭 쥐여주는 나사못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본인의 검사 역할에 빗대어 말하였다. 누군가는 매일 공중파 화면에 나가 성형수술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의사나, 북한군이 넘어온 상황과 수술 상황들을 매일같이 브리핑하는 돛대나 깃발과 같이 나서는 의사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사회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은 의사들만으로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들 잘 때 일하고, 피가 낭자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피가 나의 수술복과 속옷까지 파고들어 피범벅이 되는 상황을 묵묵히 견뎌내는 경첩과 같은 의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방의 한 대학병원이라는 이곳에도 전문의, 전공의 합쳐서 250여 명의 의사가 있다. 나뭇가지에 여러 나뭇잎들이 있는 것처럼 제각각 의사가 여기에 존재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환자들 치료는 화려하게 해서 성공적으로 치료해 주는 의사, 환자보다 본인 사리사욕을 위하는 의사, 묵묵히 경첩같이 고통 속의 환자를 지지와 치료해 주는 의사도 있다.
경첩이 든든히 견뎌만 준다면 무거운 문짝이나 창문도 거뜬히 매서운 비바람을 견뎌내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환자와 보호자도 경첩의사가 희망을 잃지 않고 경첩같이 굳건히 지키고 버텨준다면 살아날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환자 머리맡에는 환자의 이름과 동시에 경첩 의사의 이름도 함께 쓰여 있다.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힌지를 만드는 회사는 폴더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는 그 어렵던 시기를 묵묵히 지켜준 것이다. 그 묵묵함 인내심과 믿음으로 그 회사는 다시 접히는 스마트폰 시대에 다시 힘을 내고 빛을 보게 된 것이다.
4.
멀리 목적지로 떠나는 열차는 여러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나 넓고 더 쾌적하고 간식도 주는 특실 칸을 타고 싶지만, 각자의 상황에 따라 맞는 객실을 타고 간다. 모든 객차의 바퀴는 동일하게 둥글다. 특실 객실을 받치는 바퀴와 일반 객실의 바퀴도 같은 크기와 모양이다. 제일 저렴한 가격의 객실을 받쳐주는 기차의 바퀴를 쪼여주는 나사가 든든히 조여주여야지 특실을 포함한 모든 기차가 든든히 굴러간다. 경첩의사가 버텨주고 쪼여주는 바퀴가 든든해야 특실칸이든 일반칸이든 기차가 안정하게 굴러갈 수 있다. 수십 년 된 옷장이 제 역할이 다하는 날이 오면 분리수거되어 버려진다. 나무와 경첩이 분리가 되어 나무와 쇠로 각각 배출될 것이다. 그제야 모르고 수십 년간 사용하였던 옷장이 제 역할을 하고 버텨준 것이 그 녹슨 경첩 덕분이라고 알 수 있다. 누군가는 말해 줄 것이다. 수고했다고 녹슨 경첩에게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