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일이다. 아직 어린 나이기에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아마 처음으로 누군가의 죽음, 내가 아는 사람이며 더군다나 나보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교통사고다.
시골 언덕 위에 세워진 초등학교를 등하교하는 넓은 길이 있다. 아스팔트를 깐 지 얼마 안 되어 다니는 차나 그 길을 다니는 어린아이들 모두 서툴고 서두르던 시기였다. 지금처럼 횡단보도, 신호등이 전혀 없었다. 어린이 보호구역 제한속도도 전혀 없었다. 길을 가로지르는 아이들, 속도제한도 없는 시기라 무제한으로 빨리 달리는 차들, 모두 다 위험요소들이다. 길을 넘나드는 사람이나 빨리 달리는 차나 모두 다 그 위험들을 모르고 있던 시기다. 나 또한 매번 그 길을 지나다니며 아슬했던 몇 차례 기억이 있다. 또한 매번 엄마 아빠를 통해 길조심, 차조심하라고 들었다.
소문은 빠르다.
슬픈 소식은 더 빠르고 가슴속을 쿵 때리면서 온다.
내가 매일 다니는 그 아스팔트 길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동생이 사고를 당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동생이 길을 가로질러간 것인지, 커다란 트럭이 달리는 와중에 그 아이를 못 본 것인지 둘 다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사고 후 어디 큰 병원으로 실려갔다. 사고, 큰 병원이라는 말을 듣는 자체도 어린 나에게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처럼 119 구급대, 구급차량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아마 어느 차, 아니면 택시에 실어 동생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로 큰 병원을 찾아 헤매고 달렸을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으로 간 것만 알았지 공식적으로 담임 선생님을 통해 동생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 동생의 형과 가족들도 잘 알고 함께 해수욕장에 놀러 가서 찍은 단체사진도 있다. 아주 가까운 동네 동생이다.
같은 마을 이웃이다. 멀리 한걸음에 뛰어갈 수 있는 동생네 집이 보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 어느 비 오는 날 내 인생 라면을 먹었다. 그 동생 집에서 인생 라면을 끓여주신 것이 그 동생의 어머니다. 그렇기에 나의 충격은 컸다. 하지만 충격, 슬픔을 받아들이는 자세, 태도는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다. 아마 같은 반 친구는 그 충격을 이미 더 어린 시절에 한차례 겪었기에 슬픔을 별거 아니라고 말하였다. 같은 반 친구는 더 어린 시절에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을 가졌기에 나와는 다른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동시에 언제나 같은 것의 반복이며 복선의 연속이다.
10살 어린 나이에 그 아픔을 가슴에 묻어두었고 너무나 충격이었기에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충격을 나는 일기장에 몇 자 적어놓았다.
'나는 내가 그때 A의 형이라면 죽을 것 같았을 거다.
남의 얘기를 소중히 다루겠다
그리고 A가 죽어서도 편안히 잘 잠들게 명복을 빌겠다.'
시간이 한참 흘러 나는 시골 고향을 떠나 광역시에 주민등록을 둔 도시 사람으로 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동생이 생각나고 서랍 깊숙이 있던 일기장을 들춰보았다. 몇 글자, 몇 문장 안 되는 일기지만 10살의 충격과 슬픔이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
매일, 하루에도 많은 교통사고, 산재사고 등 수많은 다치고 피나는 환자들을 나는 본다. 30년도 전에는 그 단어, 사건 자체를 듣는 것조차 무섭고 두려웠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어린 나에게 충격은 지금의 나의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그때는 슬픔으로 끝이 났지만 이제는 생명을 살린다는 기쁨, 희망이 더 커졌다.
1989년. 그 가슴 아렸던 기억. 그리고 그 가족들의 슬픔. 학교 아이들의 슬픔
시간이 많이 지나 2023년이 되었다.
동네 동생의 교통사고로 두려움과 충격, 슬픔에 빠졌던 어느 시골 아이는 권역외상센터 외상외과의사가 되었다.
그 외상외과의사는 이렇게 살고 있다.
한 생명의 죽음, 삶의 마감은 당사자, 그 가족 그리고 동료들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고통이다. 그 아픔과 고통들이 없기를 있더라도 아주 조그마한 슬픔과 고통이 되어주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