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전시에서
종종 남편과 내가 정말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느낀다. ‘어떻게 이걸 그렇게 생각하지?’ 하고 크게 놀라곤 하는데 이번 전시회 후기가 그랬다. 그의 전시 후기는 미술관 전시 관람 후기보다는 회사 전략공유회 후기에 가까웠다. 재밌었다. 이렇게도 전시를 관람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후기였다. 그의 전시 후기가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전시 관람을 앞두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남편 민욱은 AI 연구자다. AI를 연구한다고 해서 그를 단순 명료하고, 기계에 가까운 차가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는 기계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바라본 그는 그야말로 호모 사피엔스다. 지혜를 추구하고 탐구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사람에 관심이 많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굉장히 흥미로워하고, 이 주제를 따로 공부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고, 성장하며 행복할 수 있는지 많이 고민하고, 노력을 기울인다.
미술관을 나와 들른 카페에서 전시가 어땠냐는 내 물음에 그는 아트샵에서 산 엽서 5장을 꺼냈다. “이 엽서 이미지들로 오늘 제가 본 전시 요약이 가능해요.” 유용한 것뿐 아니라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도 탐닉하는 사람이라 엽서를 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측이 엇나갔다. 그가 전시에서 느낀 것들이 궁금했다. 그는 전시를 어떻게 본 걸까?
이번 전시에는 호퍼의 습작이 여러 점 있었다. 습작 1,2,3…이 이어지고, 그 습작의 결과물인 작품이 나오는 동선 구성이 많았다. 나는 호퍼의 습작들을 보며 그가 굉장히 치열하게 작업에 몰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호퍼의 성향을 짐작해 보고, 고뇌를 상상했다. 하지만 남편은 같은 작품을 보고도 전혀 다른 관람을 하고 있었다. 그의 관점으로 습작들을 감상하면 이렇다.
우선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호퍼는 많은 연습이 필요했을 것이다. 호퍼의 습작을 보면, 각 습작마다 어떤 부분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인물을 그릴 계획이 있다고 했을 때, 첫 번째 습작에서는 발만 그려본다. 그리고 발의 느낌이 잘 표현되었는지를 확인한다. 두 번째 습작에서는 손끝만 그려본다. 역시 손끝의 느낌이 잘 표현되었는지 재차 확인해 본다. 세 번째 습작에서는 전체 구도를 잡아보고 느낌을 살핀다. 자신이 확인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확인해 가면서 호퍼는 점점 실력을 갖춰 갔을 것이다. 스케치 습작을 하나씩 살펴본 뒤 본 작품을 보면, 그의 습작들이 어떤 결과물이 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남편은 호퍼가 화가라는 전문가로서 어떻게 자신의 실력을 향상해 갔는지를 봤다. 호퍼의 습작들은 그가 어떤 실력을 키우고 싶었는지, 의도적으로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증거였다.
두 번째로 남편이 전시에서 느낀 건 이 전시는 개인전이 아니라 부부 전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호퍼의 아내 조세핀이 정리해 둔 자료들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조세핀이 남긴 자세한 작품 노트와 수많은 기록들이 호퍼를 더 인정받게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조세핀의 기록 덕분에 전시가 더 쉬웠어요. 조세핀 없이 호퍼가 이 정도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싶어요.” 기록과 작품활동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꼼꼼하게 호퍼 작품의 모든 것을 기록해 둔 조세핀의 공로가 크다고 남편은 힘주며 말했다.
세 번째로 남편을 사로잡은 건 호퍼가 그린 세련된 일러스트 작품들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호퍼가 전업작가가 되기 전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작업한 삽화들이 많이 왔다. 지금 봐도 세련되고 멋진 1800년대 작품들에 민욱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선, 색감, 구도에 대해서 이 사람이 이렇게 신나게 말한 적이 있던가. 옷의 재질과 재단을 따져보길 좋아하는 그에게 호퍼의 잡지 삽화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세계였던 것 같았다.
남편은 마지막으로 이 전시가 자기가 본 전시 중에 가장 친절한 전시였다는 평을 덧붙였다. 이 또한 조세핀의 사료 덕분이라는 추측과 함께. 그는 웬만한 전시는 모두 오디오가이드를 정주행 하는 모범생 스타일인데, 대부분의 전시 해설이 뭘 자꾸 느껴보라는 통에 난해했다고 한다.(좀 느껴봐…) 하지만 이번 전시 오디오가이드는 딱 그 작품이 언제 어떻게 그려진 건지, 호퍼가 그 작품을 그릴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보여서 오히려 작품에 집중하기 좋았다고. 미술관에 가면 뭘 느껴야 하고, 알아야 하는지 난해했는데 이번 전시는 그렇지 않아서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즐거웠다고 했다.
사실 전시 예매는 충동적으로 하고, 관람 당일에 전시 후기를 보며 걱정했었다. 대부분의 후기들에서 기대했던 호퍼의 중요한 작품들이 거의 오지 않았고, 앙꼬 빠진 절편이라는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의 감상 후기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작품 감상에 있어서 즐거움이란 각자의 몫이라고. 우리 모두에게는 감상의 자유가 있다고. 호퍼의 대표작이 뭔지는 몰라도 누구보다 만족스럽게 전시를 다녀온 남편을 보며 나도 덩달아 전시가 더 만족스러워졌다
유명 화가의 작품에서 대표작을 보고 그의 커리어 절정 혹은 대단한 성취를 느껴보는 것도 좋지만 그게 감상의 전부가 되는 건 너무 헛헛한 일 아닐까. 마치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만 찍고 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전시 기획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남편은 호퍼가 현대 도시인의 고독을 다룬 화가로 유명하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도시도 있지만 시골 그림도 되게 많았는데… 여행 많이 다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시를 더 많이 그렸군요. 아무튼 전 호퍼 인생과 화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잘 보고 온 것 같아요. 이 사람 마음에 들어요.”
집에 와서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전시 소개글을 찾아봤다. 그는 누구보다 전시를 기획의도에 맞게 잘 관람한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일대, 케이프코드 등 작품 속에 작가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를 따라, 도시의 일상에서 자연으로 회귀를 거듭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혀간 호퍼의 65년에 이르는 화업을 돌아본다. (중략) 흔히 호퍼라 하면 현대인의 고독을 다룬 작품을 떠올리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다채롭고 심오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사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당신도 잘 알겠지요.”라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여러 장소에 대한 특유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섬세한 관찰에 자신만의 기억과 상상력을 더한 화풍을 평생에 걸쳐 발전시켰다. 이번 전시가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의 작품이 여러모로 지친 우리에게 공감과 위안을 주기를 기대한다.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전시기획의 글 부분 발췌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있는《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호퍼 입문 전시로 추천한다. 재밌고 풍성한 전시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라는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는지 살펴볼 수 있다. 오디오가이드는 미술에 별로 관심 없고 잘 모르는 공대생도 재미있게 들을 수 있고, 전시장에서는 교과서에서 본 명화 같은 풍경화부터 인물화, 뉴욕풍경, 잡지 일러스트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지 않을 것이다. 잘 그렸다, 예쁘다 같은 감탄사들도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부담 없이 즐기고 알아갈 수 있는 전시로 호퍼 전은 추천할만하다.
추신. 그의 감상기를 기록한 나는 조세핀에 비할 만하지 않은가.
전시의 여운이 남는 이들에게는 휘트니뮤지엄홈페이지에서 호퍼의 작품들을 둘러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