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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네 Nov 24. 2016

계절이 지나가는 곳.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수십 번째 맞이하는 겨울일 것이다. 그 안에서 엄마는 조금 더 지혜로워졌을 것이고 아이는 그 시간을 행복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전혀 특별하지 않은 하루였다."





유럽으로 통하는 러시아의 창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수많은 발레 공연, 도스토옙스키나 푸시킨 같은 위대한 문학인이 사랑했던 도시에 거는 기대감은 컸었다. 유럽의 어떤 것을 기대했던 것이 맞다. 각종 매거진과 블로거들도 아름답다 칭송하는 6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파리보다 덜 우아하고 런던보다 덜 역동적이며 베를린보다 덜 정돈된 도시였다. 여행하기 좋은 온도의 도시에는 곳곳에 관광버스의 배기가스 냄새가 진동을 했었고, 유명하다 싶은 관광명소에는 사람 말고는 눈 둘 곳이 없었다. 










계절이 지나는 도시의 하늘은 어둡기만 하고 한 덩어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커다란 건물은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진 못했다. 밤사이 어둠 속에 가려졌던 11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은 여전히 6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많이 다르진 않았고 춥고 스산할 뿐이었다. 그러나 빛 대신 쏟아지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여름에는 만날 수 없던 진짜 러시아 앞에 추위쯤은 아무것 도 아닌 것이 되었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덜컹거리는 나무 창문 틈에 쌓인 눈은 타국에서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발레학원을 등록하러 가는 길이었다. 6월에 걸었던 길이라는 걸 기억해 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으로 가득 찼던 거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소복이 쌓인 눈뿐이었고 남편의 안내로 긴장감 없이 걷던 그날과는 달리 차가운 온도에 겹겹이 입은 옷들이 거추장스러울 만큼 낯선 풍경이었다.






오래된 건물의 소박한 창문 사이로 보이는 중정의 풍경은 그림 같았다. 부서질 듯 아찔하게 세워져 있는 공간들 위해 안정감 있게 내려앉은 눈은 내가 러시아의 겨울 입구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복도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어둠이 공기처럼 뿌려져 있는 회색 도시가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겨울궁전"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따뜻한 시간 동안 북적이던 광장에는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비수기에 찾은 약간의 관광객들뿐이었다. 겨울의 에르미타쥬 미술관은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붐비지도 않으며 원하는 작품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오랜 시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까지 주어진다. 









한국에서는 매 해 겨울마다 도시가스비 폭탄을 걱정할 만큼 추위에 약하지만 서른다섯 해 만에 맞이하는 장관 앞에 세찬 눈바람은 낭만적이기만 했다. 비록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찬바람에 찢어질 듯 아픈 광대뼈와 볼 주변에 바셀린을 바를 정도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여름보다 겨울이 아름답다는 나의 시선은 러시아가 추운 나라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든 마른 가지와 곳곳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 위로 풍성하게 내리는 하얀 눈을 보게 된다면 여민 옷깃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마저 사랑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수십 번째 맞이하는 겨울일 것이다. 그 안에서 엄마는 조금 더 지혜로워졌을 것이고 아이는 그 시간을 행복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전혀 특별하지 않은 하루였다. 나라에서 조절하는 라디에이터의 온도는 내 맘대로 방 안의 온도를 바꿀 수 없기에 이 곳의 다른 이들보다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계절을 보내고 있고 한국에서의 생활비의 1/3 의 돈으로 한 달을 살아내야 하기에 특별히 사치할 수도 없다. 







익숙해질 때쯤 이런 풍경과 하루는 쌓여서 일상이 되어 있겠고 그것이 습관이 되었을 즈음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다시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고 놓인 현실 앞에 허둥댈 것이다. 채우지 못한 욕심 때문에 잠을 못 이룰 수도 있을 것이고 남이 가진 것이 부러울 것이다. 그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눈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사진 속 저 노부부를 기억해야지.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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