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영자
류영자는 토끼해인 1951년 12월 2일 장녀로 태어났다. 문화류 씨가 약 150년 전에 이주하여 정착된 마소에서 태어난 그녀는 김만임, 류 00의 맏이였고 위로는 오빠가 둘이었지만 바로 위 오빠가 태어나서 몇 개월 병으로 못 살고 돌아가셨다. 그때는 태어나자마자 어린 아기들이 백일을 못 넘기고 죽는 경우도 많아 백일을 치르는 일이 귀했다. 류영자는 셋째로 태어났지만 오빠의 죽음으로 장녀가 되었다. 밑으로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고 12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 막내가 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의 지형은 말의 형상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소의 형국이라고 하는데 마을의 형국을 그대로 옮겨 마소 또는 마연이라 하였다. 문화류 씨 문과급제의 무덤이 있는 자신의 뿌리가 오래 터전을 이룬 유서 깊은 곳에서 시냇물이 흐르고 산이 둘러싸인 즉 배산임수로 이루어진 아득한 촌락에서 그녀는 자랐다. 왕가를 가진 성씨와 촌락을 이룬 곳에 류 씨 가문의 종갓집 며느리였던 류영자의 엄마는 자신의 딸을 류 씨 가문의 맏딸로 키웠다. 그 해 시골에서는 여자들은 국민학교 졸업도 간신히 했고 중학교 입학은 꿈도 꿀 수 없이 가난했지만 류영자는 여동생이 국민학교 졸업도 못 시킨 것과 다르게 중학교까지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학문에 뜻이 있던 류영자는
독학을 해서 한자를 모두 익혀 한자로 시를 짓기에 이르렀고 그 해 한자로만 이루어진 신문을 40이 넘도록 읽었다. 그녀는 퍼즐 맞추기에 달인이었다.
여동생이 12살 될 무렵 아버지를 여의였고, 일찍이
말수가 적고 조용하지만 인자하셨던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던 류영자는 서울에 취직해 큰 회사에
다녔다. 회사에 취직한 그녀는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며 서울에서 멋진 아가씨로 성장한다. 스스로 돈을 벌어 정장을 입고 시골에서는 누리지 못한
온갖 문화생활을 즐긴다. 서른이 다 되도록 시집갈 마음 없이 자신의 삶을 누린 그녀가 선을 보게 된다.
회사에서 중매를 서서 만났던 집안이 부요하고 서울에서 학교 선생님이었던 그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것을 못내 후회하였다. 가끔 자신이 낳은 딸에게 그 남자랑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묻곤 하였다.
같은 고향인 남원사람과 선을 보고 결혼을 한다. 그것은 바로 30살 노처녀가 임신을 했다. 임신과 더불어 결혼식을 치르고 남원에 집이 한 채 있다고 한 남편이 알고 보니 집은 다 허물어가는 초가집이었고 살 수 없는 방 한 칸의 낡고 지저분한 다락방처럼 신혼을 꾸릴 수 없는 오래된 움막집이었다. 아기를 임신한 그녀는 서울로 상경해 지금껏 잘살다가 이런 곳에서 아기를 키울 수는 없었기에 본인의 시골 마소로 친정 엄마집에서 30에 낳았다. 시골살이를 원치 않았던 그녀는 첫눈에 반한 남편의 끝없는 구애에 결혼에 이르렀고 임신은 했지만 다시 시골살이를 하며
가난에 허덕여야 했으며 남편의 입장에서는 처가살이가 시작되었다. 류영자는 시골에 결혼해 살았지만
40이 되도록 만년 부녀회장이었다. 모두들 시골을 떠나는 마당에 고향인 자신의 고장에서 자식을 낳고 키우는 젊은 새댁은 류영자였으니 부녀회장을 할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다. 농사짓는 거 말고는 근근이 살 수밖에 없는 그녀는 지역발전에 발 벗고 나선다. 그녀가 고춧가루 빻는 기계를 사서 김장철이 되거나 하면 500원을 받고 농사지은 고추를 갈아준다.
또 낡은 시멘트로 지어진 회관을 허물고 벽돌로 된 회관을 짓는다. 그녀는 요리를 잘한다.
그녀는 매해 주택복권을 빠짐없이 사서 아로나민 노란 골드 통에 모아 놓은 게 꽝이지만 넘친다.
그녀는 가계부를 꼼꼼히 손글씨로 적어둔다.
남편의 집 짓는 일로 벌어오는 노동으로 번 돈을
모아 논 한평 없던 그녀는 점차 자신의 논도 서너 마지기 사기 시작한다.
류영자는 무슨 일이 있으면 입버릇처럼
"아버지."를 찾는다. 아부지 아부지 아이고 아부지
그녀는 아버지가 구원을 이루어줄
대상인 것을 무의식 중에라도 알았을까?
그녀는 틈만 나면 아이고 아부지를 부르짖는다.
그녀가 지은 시 중에
" 아이고 아부지
나는 가야 해
나는 가야 해
나는 가야 해."
라는 시가 있다. 그녀는 날마다 손에 500원을 딸에게 쥐어주고 본인은 나가지 않는 주일학교를 헌금을 줘서 보낸다. 착한 딸은 고스란히 500원을 매주일 헌금한다.
남원은 춘향이를 뽑는 행사를 광한루에서 매번 하는데 그때마다 천막을 치고 부녀회장으로 음식을 만들고 각 지역 장터를 열어 오고 가는 지역 주민들에게 음식을 팔고 잔치를 벌인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감자수제비를 만들어 요리 대회 우승도 한다. 글짓기를 좋아해 지역인들이 모여 시인들과 문집도 만들어
시집도 낸다. 그녀는 30에 얻은 딸에게 시골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사교육도 시킨다. 그녀의 딸은 예쁜 원피스며 각종 학용품도 넘쳐난다.
본인은 매번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색조 화장품으로 곱게 단장하며 딸의 입학식에는 잘 다려진 정장과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구두도 신는다.
쥬시후레쉬 껌 씹는 것은 하루의 일과다.
이것은 결혼하자마자 6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서 돈을 벌고 온 남편의 수고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신혼이 없이 멀리 돈을 벌러 간 남편과 나눈
러브 레터는 아로나민 노란곽속에 차곡차곡 6년을 모아 모아 쌓여 넘쳐난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쓴 존칭이 가득한 그녀의 편지는 사랑하는 딸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딸이 여섯 살 되던 해 그녀는 남편이 외국에서 돌아와 제대로 된 부부로 해후한다. 그날
또 역사는 이루어지고 둘째 첫아들이 태어난다
아들이 열 살이 되던 해 그녀는 46세의 짧은 나이로 급성 간경화라는 병으로 생을 달리한다. 그녀는 페미니즘의 선구자였을까. 그녀의 옷장에는 말끔한 정장들이 몇 벌씩 가지런히 놓여 있고 입지도 않은
코르셋이 수십 벌 있다.
그녀가 뜨면 그녀의 친척 가족들이 전부 모인다.
그녀의 오빠네 가족, 여동생. 그녀가 해 놓은 음식을
먹고 술잔이 기울어지고 흥이 넘친다.
그녀가 친정집이 아닌 처음 장만한 시골 큰집 마당에서 그녀의 장례는 3일장이 치러지고 상여가 떠날 때까지 손님들이 넘쳐난다.
그녀와 먹고 마시며 대접했던 그녀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그녀를 10년은 넘게 잊지 못한다.
그녀의 딸을 만나는 조합 사람들마다 그녀가 떠나고도 그녀의 딸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네가 영자 딸이지 라며 눈물이 그렁거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지나가는 누구라도 불러들여
부침개를 부쳐 먹이고 결혼 내내 놀기만 하고 밥벌이를 못하는 남편의 남동생들을 부모 없이 자란 결핍을 채웠다.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지나가던 행인이 몸이 불편해 자신이 장만한 집 마루에 먹은걸 모두 게워내도 바가지로 물을 부어 마룻바닥을 씻고 본인의 옷장에서 말끔한 옷을 꺼내 입혀 다시 먹이고 웃돈까지 챙겨 내보냈다. 그녀의 선행은 어디까지였을까.
그녀는 아침마다 친정집 부뚜막 솥 앞에 자신의 엄마와 맞담배를 피며 동네 사람들이 찾아오면 꽁초를
활활 끓고 있는 장작더미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녀는 마흔여섯 짧은 생을 살았지만 병원에서 죽기
하루전날 담배 한 개비를 사달라고 딸에게 부탁해
힘껏 빨았다. 다음날 운명했다. 그녀는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ps 삼다 마지막 학기 부모 평전을 썼습니다.
추운 한 겨울
누군가를 기억해 내는 일은 구원의 여정이네요.
불꽃같은 사랑과 부모의
아름다운 지난 삶을 반추하는 일이
참으로 값진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