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사랑의 전당 -김승희-
으리으리한 당신, 으리으리한 우리의 사랑을
일구는 당신에게
힘든 시절에 당신과 내가 살았네
난 당신이 좋더라 처음에는 자꾸
요리를 해서 나에게 먹이는 거야
사실 난 먹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지
아침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 내내 성인이 되어서도
챙겨주는 사람 없어 습관이 되어 안 먹었는데 말이야
매번 밥을 먹는 당신이 오히려 이상했지
요즘은 당신 덕에
내가 밥을 잘 챙겨 먹는 중년 여성이 되어가고 있어
난 뜬금없이 자주 보고 싶다 사랑한다 말하고
당신은 뜬금없이 장을 봤다 요리를 해주고
당신이 가족이 챙기는 방식이라는 것 알아,
새해 맞아
떡국도 끓이고 만두도 빚고 잡채까지 만들어서
날 먹인 것 고마워
아침 일찍 나가 밤까지 차가운 시멘트 벽을 오르
내리며 추운 겨울 엄살 한 번 없이 일하고 돌아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하며 잠들어 있는 당신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콧등이 시큰해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며 노동의 피로를 푸는 것 그것이 유일한 낙인 당신의 성실함이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기름진 토양 같아
앞으로 당신이 살아가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지면 좋겠어
아이들이 당신의 살뜰한 보살핌과 지원으로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 감사해
나 역시 조금은 성숙해진 사랑의 깊이로
당신께 잘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
난 사실 옆에만 있어도 당신이 좋은데
당신은 내게 무엇을 해 주어야만 된다는
무거운 부담감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
그것도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게 되는 것 같아.
사랑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가 정성으로 마음을 다해 주는 것을 받아 주는 것도
서로를 살아내는 가족의 일이 되는 것이겠지
자식들이 많으니 모두 각자의 수고들을 감당하는 것 같아 적당히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아도
각자 몫의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애틋함을 보게 돼
여보, 날이 많이 춥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동갑으로 만나 서로를 위하고 애잔해하고
보듬고 감싸고 살아줘 고마워 당신의
깊은 사랑이 철부지 나를 많이 성장시켰네
당신은 알지 내가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런 모습조차 묵묵히 견디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 가족은 무엇을. 더 해 주려는
노력보다 불편한 모습조차 수용하고 모르는 척
참아 주는 것 같아 자식이 그렇고 당신이 나에게 그래
여보 우리 벌써 마흔이 넘었어 오십은 어떨까
당신이 나에게 처음 편지했을 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자고
우리 나중에 여행 다니면서 살자 했는데
우리 노년에는 그럴 수 있을까,
이제 갓 6개월. 지난 아기가 바둥거린다. 막둥이가
아고. 여보 마흔 넘어하는 육아는 힘에 부치네
그래도 나중에는 잘 낳았다고 할 거야. 그렇지?
부치지 못할 편지를 혼잣말처럼 당신에게 쓰고 있어..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줘
고맙고 내가 요란법석을 떨며 불안하고 초조해할 때도 아무 일도 아니라며 늘 안심시켜 줘서 고마워
당신의 늘 그런 묵직함이 감사해
난 매번 오르락내리락 줄다리기를 해 그렇지만
당신은 늘 똑같은 일상을 살아 내게 안정감을 주네
여보 내가 당신을 만나서 이 만큼 사네.
사랑해요.
눈 내린 날, 당신의 평생 벗이
p.s 브런치 작가분들 저와 글을 함께 읽고 쓰는
모든 분들 새해 건강하시고 서로의 글로 온기를
나누기로 해요.^^
제 글 읽어 주셔서 벅차게 감사합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