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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내가 사랑한 계절들

by 박수경

소금인형은 시골살이 19년을 청산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도시로 올라온 그날 정했던

닉네임이었다.

줄기차게 나를 내비치는 곳에 이름 대신 소금인형을

적었다.

2000년 류시화 시집에 소금인형을 읽고 난 이후로

나는 참,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꿈꾸었다.


소금인형 / 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나이 마흔 이후에 소금인형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갑자기 떠오르게 된 것은 문득 삶의 궤적을 쫓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누군가를 몹시도 오래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한 사람을 열렬히 좋아했던 나, 지금 생각해 보니 매번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내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거절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주 친절을 베푸는 그 녀석에게 나도 모르게 길들여져서 어리석게도(?) 대학을 가서 다른 이를 좋아하기 전까지도 여전히 나의 풋사랑은 오랫동안 멈추지를 않았다.


가끔 초등학교 이후부터 스무 살까지도 잊지 못했던 그 녀석을 생각해 본다. 한 번도 그 녀석 마음을 얻지 못한 오기였을까? 아니면 시골에서 자라 그냥 순수한 순정이었을까? 중학교 동창이었던 그 녀석과 졸업하고

고등학교 가서도 버스를 함께 타던 날이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인사도 못하고 좋아했던 나의 그 마음이 지금 생각하니 참 소중했다.


지금의 나라면, 단념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때는

세상이 좁았다. 시골에 아이들이 36명이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내내 한 반이었으니

또한 시내는 나가본 적도 없었으니 사람 구경은

열여섯 살까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뿐이었다. 얼마나

좁고 작은 세상에서 살았던가


어른이 되어보니 삶은 더 넓은 세상이 아니었다.

만나서 관계 맺는 사람들의 숫자였다. 이름과 나이 직업 이런 것들이 아닌 함께 밥을 먹고 취미를 나누고

같이 공통된 경험을 하고 같은 관심사의 이야기를 나누거나 다른 주제의 경험을 서로 아는 것이다.


서른여섯 명의 세계에서만 살았던 내가 한 명을 깊이 좋아하고 오래 사랑하는 19살의 순정은 내 삶의 여러모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나는 그런 류의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자식 여섯을 낳게 된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기에 어린 시절의 나도 함께 녹아져서 사라졌고, 첫 아이를 낳은 스물네 살의 나도 어딘가 내 삶의 바다에 녹았으며 현재 여섯째를 낳은 지금 이 순간도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최고로 부서지도록 살았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 열정적으로 녹아져서 사라져 버린다는 두려움마저 그 어떤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아도 남을 자식들을

생각하며 시간이 날마다 사라져 가고 지나는 것에 대한

미련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싶어 생명을 잉태하고

자식을 여섯이나 어쩌면 조금은 미련스럽게 낳아서

시간의 연속성을 영원함을 증명했는지도 모른다.


시대를 살면서 어떤 작가, 어떤 책을 만나는 것은

참 중요하고 같은 동시대에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잠 못 이루는 밤 소금인형이라는 시를 읽지 않았고

다른 시를 읽었다면 또 그 시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어린 시절 어느 날의 짝사랑과

내 스무 살 즈음 정했던 닉네임과 그때 만났던 사람들

현재 내 주변에 나와 깊게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내가 사랑한 계절." 하루 종일 새해가 바뀐 시점에 이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가 그곳에서 발견된 소금인형 그 단어 하나에 어렴풋이 기억을 되살려 내었고

쓰지 않았던 시간으로 나를 데리고 갔으며 쓰지 않았던 그 시간에도 내 인생은 쓰이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기억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잊힌 듯

이곳에 없지만 내가 떠올리고 다시 기억해 낸다면 그것이 현재가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생생하게 살아난다.


2024년의 힘든

기억들을 조용히 묻고 장사를 지낸다. 2025년에

스무 살 갓 대학을 가기 위해 사글세 1년 치 연세를 다 주고 방을 얻기 위해 도시로 떠났던 날 기억해 낸다.

그때 나는 정말 청초하고 어여뻤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스무 살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한

순수하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리따운 아이였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이유 없이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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