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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Sep 27. 2021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하여

<연인, 1992>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연인. 소설 <연인>은 작가의 실제 어린시절 경험이 담긴 자전적 소설이다. 당시의 누보 로망이 다 그렇듯이 연인 또한 흔히들 말하는 '의식의 흐름' 대로 글이 쓰여져 있어서 소설 자체에서 무슨 감정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저 언어의 나열일 뿐. 하지만 영화는 이를 영상으로 훌륭하게 구현했다. 


전혀 상관은 없지만 <마지막 황제>를 보다가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올랐다. <마지막 황제>는 아카데미 9개 부분을 휩쓴 대작이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후에 남은 감정에 대해 추억하기에는 <마지막 황제> 보다 이 영화가 제격이다. 



이미 너무 어린 나이에 빨리 커 버린 주인공은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잘못된 투자로 인해 집은 빚더미에 앉았다. 어머니는 호치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작은 학교를 하고 있지만 전혀 수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빠는 아편 중독자에 엄마와 다른 가족들에게 폭력을 일삼는다. 제대로 일도 하지 않으면서 가정을 통제하려고 하고, 얼마되지 않는 가정의 수입을 모두 자신이 독차지 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미 18살에 늙어버렸다고 말한다.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생활은 어린 소녀를 나이든 노인처럼 만들었다.

 

개학을 하여 주인공은 학교로 돌아간다.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백인 소녀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 둘 뿐이다. 가난한 주인공은 차가 없어 사이공에서 호치민까지 버스와 배를 타고 이동한다. 카바레 신발을 신고 남자들이 쓰는 중절모를 쓴 채로. 갑판에 기대 서 있는 소녀에게 익명의 중국 남자가 다가온다. 떨리는 목소리로 담배를 피우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주인공의 나이는 이때 열다섯살 반. 남성은 주인공에게 호치민까지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하고, 여자주인공은 수락해서 둘은 호치민까지의 긴 거리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한다. 


어떤 사람에게 첫눈에 반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믿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여자 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가 하는 이 일련의 행동들이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소녀에게 남자는 흔히 여자들에게 하는 수법으로 다가가지만 순수한 소녀 앞에서,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했을 남자 역시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소년이 된다. 


이 영화는 처음 개봉했을 때 너무 야하다는 이유로 성관계 장면이 모두 삭제 되었다가 나중에 무삭제판으로 다시 개봉했는데, 영화에는 처음 욕망을 알아가는 여자 주인공과 그런 여자주인공을 사랑하게 되는 남자 주인공의 심리 변화가 매우 섬세하게 묘사 된다. 


백인 여성과 아시아인 남성, 당시 중국인을 바라보던 베트남의 시선을 반영하듯 여자주인공과 가족들은 부유한 중국인 남성을 물주, 호구 취급하며, 또 그런 남자 주인공과 관계를 하는 주인공을 가족들은 창녀 취급한다. 갓 초경을 끝낸 여자와 관계를 하는 남자. 누구든 그런 관계를 원조교제라 할 것이고, 남자로부터 여러가지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는 여자를 창녀라고 손가락질 할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던 19세기에도, 그리고 이 영화가 만들어진 90년대에도, 또 지금도. 영화가 개봉했을 때 성관계 장면이 삭제된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어린 소녀의 욕망은 건전하지 못한 것으로, 그런 어린 소녀와 관계를 갖는 성인 남성은 변태인 것으로 단정지어 지고도 남을 시기였으니 말이다. 

여러가지로 충격을 주는 성관계 이상으로 영화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밀도있게 다룬다. 단순한 호기심, 성적인 욕망, 순수한 호감, 말 없이 지켜만 보는 짝사랑, 그리고 그리움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다양한 층위의 감정들을 두 인물의 심리 변화를 통해서 아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단순히 야한 장면이나 볼 생각으로 영화를 튼 관객일지라도, 아마 영화가 끝날때쯤에는 마음이 묵직해 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이제 누군가를 20대 때처럼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사람 때문에 속상해 하고, 그 사람만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기는 이제 내 인생에서 오지 않을 것 같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을 보면 프라임 세포였던 사랑 세포가 없어지고 작가세포가 프라임 세포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세월이 지나면서 내 모습이 조금 더 단단해지고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으로 내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사랑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 그 사람을 떠올릴 때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을 떠올릴 일도,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할 필요도 없을테니까.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기록이 끊긴 일기장처럼 나와 그 사람의 마지막 페이지는 여전히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귀고, 무조건 결혼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다. 만약이라고 아무리 가정해도 지금의 모습 말고 새로운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고 해도 지금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애가 끓고, 도무지 사람을 집중하게 못하게 하는, 속절없는 감정도 있지만 어느 순간 이후로는 이렇게 끊어진 채로 그냥 형태만 남아 있는 감정도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절대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에 무언가가 남아 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문득 당신을 아직도 사랑했노라고 고백할 수도 있는.... 언젠가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네가 아무리 달라졌더라도 나로 인해 소중한 어떤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기를.




추신.

영화를 보셨다면 쇼팽의 이 왈츠를 꼭 들어보시길.. 

https://youtu.be/VOhr9DH0L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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