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물 지어준 이름들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는 기쁨 중 하나는 사랑스럽고 기상천외한 이름을 가진 사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이름들을 듣고 있다 보면 그야말로 아이가 선물 지어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사물은 왜 더 선물처럼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처음 본 물건에 아이가 느꼈던 감정이나 느낌 같은 것들이 이름 속에 함께 담기기 때문일 것이다. 좋고 싫은 기분, 이상하거나 신기했던 느낌이 새로운 이름 속에 고스란히 이름 속에 담겨 있다.
하루는 빨래 건조기에서 막 꺼낸 뜨끈한 빨래 더미 속에서 내 브래지어를 집어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찌찌꽁이 바닥에 있네. 찌찌꽁 찌찌꽁~♬"
언제나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브래지어가 웬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니 그것이 웃기고 낯설었을까? 아이는 계속 찌찌꽁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등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는 아이 노래 속에 등장하는 찌찌꽁이 뭘 보고 하는 말인지 몰라서 물었다. "찌찌꽁이 뭐야?"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아이 손에 들린 내 브래지어를 본 순간 그게 뭘 말하는 건지 알아봤다.
아빠 : 근데, 왜 찌찌꽁이야?
혜성 :... 글쎄?
아빠 : 엄마 찌찌를 꽁꽁 싸매고 있으니까 찌찌꽁이야?
혜성 : 헤헤헤헿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속옷을 볼 때마다 찌찌꽁이 떠오른다.
또 어제는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를 알게 됐다.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 하면 혹시 떠오르는 가게가 있다면 당신은 센스쟁이.
요즘 아이와 밤 산책을 자주 하는데, 약간의 모험을 즐기게 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후레시를 켜고 가로등이 별로 없는 탄천의 어두운 길목을 다니곤 했다.
약간의 모험을 하고 나면 단 게 당기는 법.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배스킨라빈스 31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5살 아이는 적당한 모험과 달콤함이 버무려진 그 밤 산책 코스를 정말 좋아해서 매번 나가자고 졸라댔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아이가 또 밤 산책을 나가자고 해서 나갔는데 좀 늦은 시간이라 이번에는 아이스크림을 사줄 생각이 없었다.
엄마 : 혜성아, 오늘은 딱 산책만 하고 들어가는 거야
혜성 : 왜? 산책하고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줬잖아!
엄마 : 오늘은 너무 늦어서 안될 것 같아. 요즘 매일 밤마다 아이스크림 먹잖아. 오늘만 쉬자.
혜성 : 안 돼. 아이스크림 사줘야 해!
엄마 : 안 돼. 오늘은 산책만 하러 나온 거니까 절대 안 사줄 거야!
혜성 : 안 돼!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 가!! 큰집 아이스크림가게 가라고!! 큰! 집!!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 밤 산책하면 사주는데 왜 안 사줘~!! 큰집 아이스크림가게 가~!!!
(엉어엉어어어어엉엉엉엉엉)
아이는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크게 울었는지 아이스크림가게 옆집이 떡집이었는데, 떡집 사장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문간에 서서 아이를 지켜볼 정도였다.
나는 갑자기 듣게 된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이가 그곳을 그런 이름으로 부를 만큼 얼마나 대단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차렸다.
그래서 결국은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로 했다. 너에게 그곳이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배탈날까 걱정되는 엄마 마음 한 번 굽혀 주지.
그런데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 아이와 함께 지갑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엄마 : 그런데,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가 대체 어디야?
혜성 : 과자에 동그란 아이스크림 담아주는 데
엄마 : 아~ 배스킨라빈스 맞지?! 거기가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구나~
혼자 빵 터져서 배스킨라빈스 31이 어떻게 생겼나 떠올려 봤다. 나에겐 그냥 흔하디 흔한 아이스크림 가게지만 아이에겐 임팩트가 상당했던 것이다.
우리 동네 배스킨라빈스 31은 샤방샤방한 분홍빛 인테리어에 유독 크고 환하고 넓다. 가게 입구도 크고, 아이스크림 진열대도 넓고, 고를 수 있는 아이스크림도 많고. 5살의 작은 몸으로 처음 만난 배스킨라빈스 31 매장은 그야말로 크고 웅장했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아이스크림 천국처럼 보였을지도. 아이스크림 천국이라고 안 한 게 어디냐.
'찌찌꽁'에 이어서 '큰집 아이스크림 가게'를 계기로 아이가 새롭게 이름 지어준 사물에 대해 떠올려 봤다.
톡비서로 잘 알려진 카카오톡 죠르디 캐릭터는 '브로디'로 통한다. 얼마 전, 카카오 프렌즈샵에서 죠르디 인형을 사줬는데 처음 만지자마자 너무 부드럽다며 그 촉감에 푹 빠졌다. 죠르디는 부드러우니까 브로디.
엄마 턱 밑에 난 뾰루지(여드름)은 '뾰조리'. 깨끗하고 말간 아이의 얼굴과는 달리 내 얼굴은 한 달에 한 번 생리 주기가 다가오면 턱 밑에 대왕 여드름이 나곤 한다.
아무리 엄마 얼굴, 내 얼굴 비교하며 요리조리 들여다봐도 사람 얼굴에 왜 그런 흉측한 게 생기는지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5살 아이. 그런 아이에게 뾰루지는 요리조리 뜯어봐도 알쏭달쏭 뾰조리다.
좋고 싫은 것도 이름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애착 베개 이름은 '기여미', 그림 없는 검정색 티셔츠는 '벌레옷'. 옷 색깔이 마치 벌레 색깔 같단다.
아이가 좋아하는 세상인 퍼피 구조대(Paw Petrol) 만화에서 이름을 따온 것도 있다. 칠리 미트볼 요리 이름은 '취리'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착한 역할의 굿웨이 시장님이 칠리 요리를 좋아하는데, 시장님이 말할 때마다 호들갑스럽게 '취리~'라고 해서 아이도 그렇게 부른다.
(어느 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혜성 : 엄마 나 취리~ 해줘.
엄마 : 뭐? 취리? 취리가 뭔데?
혜성 : 퍼피 구조대에서 먹는 거야. 빨간 소스 뿌려진 건데. 엄마 그거 매워? 빨간 소스잖아.
엄마 : 빨간 소스? 그럼 고추장 소스 들어간 건가? 맵지 않을까?
혜성 : 그래도 해줘! 먹고 싶어어어어~~
엄마 : 알겠어. 근데 '취리'가 뭔데?
혜성 : 빨간 소스에 동글동글한 거 들어간다니까!!
엄마 : 빨간 소스에 동그란 거... 제육볶음인가? 아 뭐지. 진짜 모르겠어... 혹시 칠리소스를 끼얹은 미트볼이야?
혜성 : 아니, 취리라고!! 취~ 리!!!
엄마 : (신호등 빨간불에서 잠시 운전을 멈추고 미트볼 요리 사진 찾아서 보여줌) 혹시 이거야?
혜성 : 어, 맞아 이거!!! 이거 취리야! 이거 먹고 싶어!!
엄마 : 뭐야, 미트볼 맞잖아...
엄마도 때론 이렇게 새로운 이름은 단번에 알아듣기 힘들다. 아이의 이런 습성은 10살 형아와도 소통을 어렵게 만들 때가 있다.
(어느 다른 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혜성 : 형아, 저 구름 좀 봐. 포켓몬스터 '꾸꾸꾸기' 모양 같지 않아?
태양 : 뭐? 꾸꾸꾸기? 그건 퍼피 구조대에서 나오는 노래 아니야?
혜성 : 아니야! -_- 포켓몬에도 꾸꾸꾸기 있어!!
태양 : 아니 포켓몬스터 내가 다 봤는데! 그런 거 없는데?
혜성 : 아니야 있. 다. 고!!! 엄마 형아가 또... 내 말 틀리대. 내 말 안 들어!!(울먹거리기 시작한다)
태양 :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없어서 없다고 하는 거라니까? 그럼 어떻게 생겼는데? 꾸꾸꾸기가 어떻게 생겼는데?!
혜성 : 하늘을 날아다녀.
태양 :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혜성 : 아니 진짜!! 이럴래?!! 하늘 날아다닌다고! 그런데 다리는 없어!!
아빠 : 다리가 없다고? 그럼 땅에서는 어떻게 걸어 다녀?
태양 : 색깔은 무슨 색인데?
혜성 : 노란색이야.
아빠 : 혹... 시... 카푸꼬꼬꼭이야?
혜성 : 어 맞아!!
태양 : 아 뭐야 그럼 꾸꾸꾸기 아니네!(허탈)
아빠 : 근데, 오묘하게 비슷하지 않아 태양아? ㅋㅋㅋㅋㅋ
태양 : 아 진짜 비슷하긴 한데... 야 너 형아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알겠지?! 원래 이름은 카푸꼬꼬꼭이라고!
혜성 : 아니야 꾸꾸꾸기야!
엄마 : 혜성이가 퍼피 구조대를 너무 좋아해서 이름을 거기서 비슷하게 기억하나 보다. 우리 서로 이해 해주자. 혜성이도 형아도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런 건 아니잖아.
아이가 새롭게 이름 짓는 일상은 때로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운전해서 집에 돌아오는 평범한 길도, 빨래를 개던 시간도, 심지어 내 얼굴에 대왕 여드름이 나서 거울을 보기 심란했을 때도 그때를 떠올리면 귀여운 이름들이 떠올라 자꾸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