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안경
진화 이경희
요즘 평생 쓰던 안경을 벗는 친구들이 많다. 안경을 벗을 뿐 아니라 도수 없는 패션안경이나 선글라스로 멋을 내는 빈도가 늘고 있다. 청년기에는 주로 레이저로 각막을 깎아내서 시력을 조절하지만 중장년을 넘어서며 노안이 겸해서 오는 경우에는 인공수정체로 갈아 넣는다. 처음에는 불안하고 겁이 나지만 막상 수술을 하고 나면 안경 없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한다. 최근에는 팬데믹 사태로 비대면 강의와 회의까지 온라인으로 하다 보니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눈이 점점 침침해진다. 근시라서 노안도 늦게 오고 안경만 벗으면 가까운 데가 잘 보이던 것이 점점 아물아물하다. 근거리 안경을 따로 맞추어 시력 고정을 해보려 하지만 예전처럼 맑고 깨끗한 느낌이 없다. 혹시 백내장이 온다면 노안수술을 겸해서 해볼까 고려하는 중인데 간단한 피부과 시술조차 한 적이 없을 만큼 몸에 손대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어릴 때는 얼굴에 비해 눈이 큰 편이라 그것이 그나마 용모 중의 장점이었는데 평생 안경을 쓰다 보니 안경을 벗은 민낯이 도리어 어색하게 느껴진다. 가족 외에 나의 본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일주일에 두어 번씩 생후 칠 개월 된 손녀를 봐주러 가면 안경을 바꿔 낄 때마다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확인을 하고,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까꿍’ 하면 까르르 소리를 내어 웃는다. 무엇이든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까만 눈망울이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알아채는 것이다. 아기는 눈으로 새로운 정보를 속속 받아들이고 익힌다. 그러기에 ‘몸이 100냥이면 눈이 90냥’이라는 속담이 있는가 보다.
처음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맨 앞에 앉아서도 칠판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기에 시력 검사를 하고 안경을 썼는데 당시만 해도 안경 쓰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서로 써보자고 하다가 안경을 망가뜨리는 일도 있었다. 까만 뿔테를 시작으로 해서 금테, 무테, 반테 등 그동안 거쳐 간 안경만 해도 수십 개는 될 테지만 분신과도 같이 얼굴에 늘 쓰는 물건이라 신중하게 고를 수밖에 없다. 얼굴에 맞는 예쁜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우선 가볍고 편한 것이 우선순위였는데 요새 어린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면서 생각을 바꿨다. 너무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안경보다 밝고 재미있는 모양의 안경을 쓰면 인상이 좀 달라 보이지 않을까 해서다. 생각 같아서는 각종 동물이나 사물을 본뜬 안경을 쓰고 아기와 즐거운 놀이를 하고 싶다.
거의 20년 간 단골 안경점에서 안경을 맞추다가 그 가게가 문을 닫고 나서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갈수록 안경 값이 고가로 올라가서 맞추기가 부담스러워 오랫동안 렌즈만 바꿔 쓰다가 이번에 나온 재난지원금으로 안경을 사러 갔다. 새로 찾아간 우리 동네 안경점은 매우 특이한 가게다. 비싼 렌즈를 권하지 않을뿐더러 개성 있는 안경테를 구비하고 저마다 특징 있고 재미있는 디자인의 안경을 진열해 두었다. 안경점 주인은 안경사라기보다는 아티스트 같은 인상을 가진 분이다. 평소에 쓰지 않던 디자인의 안경을 써보며 인상이 어떻게 달라지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신기하게도 안경에 따라 얼굴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뀐다. 내가 갖가지 안경을 써보고 즐거워하니 소장하고 있는 희귀 상품도 스스럼없이 써보라고 했고 심지어 100년 이상 된 빈티지 안경도 보여주었다. 안경점에 가서 부담 없이 다양한 안경을 써보고 역할놀이를 해보기는 처음이다.
안경과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모자인데 비싼 옷을 입지 않아도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소품이다. 내가 평소에 입는 옷이 주로 무채색이 많지만 거기에 모자만 바꿔 써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고, 평소에 처음 보는 사람들도 선생님이냐고 묻는 고지식한 인상을 깰 수 있다. 재미있는 안경을 쓰고 특이한 모자를 쓰면 전형적인 인상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서양화가는 본인이 쓰던 갖가지 안경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한다. 그 안경을 쓰고 내다보았던 다양한 세상을 창조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나를 닮았는지 호기심이 많은 손녀는 신기하고 별난 것들을 보며 매일 새로운 감각과 지혜를 열어나간다. 나는 아기와 놀 때 가능한 한 엎드리거나 누워서 눈높이를 맞춘다. 이제는 배밀이를 하고 무릎으로 기려고 몸을 흔드는 시기라 내가 무릎으로 앉아 마주 보면 소리 내서 웃으며 안경을 잡으려고 손을 뻗친다. 점점 어두워지는 나의 시야에 맑고 싱싱한 영혼이 선명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