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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Aug 26. 2020

폭풍의 바다 위에서

강력한 태풍이 다가오는 느린 시간 속에서

폭풍의 바다 위에서

진화 이경희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면 장마가 지나고 태풍의 소식을 듣는다. 태풍전야인 지난 밤은 바람조차 없이 무더워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몇 번의 자연재해를 입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특히 바람을 동반한 폭우의 위력은 가히 위협적이라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해 겨울에는 적도 부근이라 일년내내 여름이 계속되는 필리핀 제도를 찾았다. 평소 친분이 있는 선교사님의 안내로 여객선을 탈 때만 해도 바다는 햇살에 반짝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야자나무가 우거진 섬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풍경을 보며 낙원이 있다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머물던 섬에는 청년 시절에 여행을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독일인이 커피와 스낵을 파는 초막카페가 있었다.
 
섬에서는 사흘 정도 머무를 예정이라 이틀째 되는 날은 늦잠을 자고  해변의 카페에서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었다.

여유있게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주인장이 먼 바다를 바라보며 혼잣말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태풍은 여러 날 걸리겠는걸. 배가 있으면 오늘이라도 섬을 벗어나야지 내일은 배 뜨기가 어렵겠네."
 
도마뱀이 들락날락하는 허술한 통나무 숙소도 미덥지 않았고, 태풍이 얼마나  강하게 오래 갈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까지 정기 여객선은 없지만 개인 배는 빌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민박집 주인이 말했다.

태풍이 불면 여객선이 결항 될 것이고 섬에 발이 묶였다가는 중요한 일정을 놓칠 수도 있다. 부리나케 짐을 챙기고 비닐봉지에 밥 몇 덩이를 비상식량으로 담았다.
 
섬을 나선 것은 오후 두 세 시 무렵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마닐라에 가서 저녁을 먹을 요량이었다.

통대나무가 게발 같이 균형을 잡고 돛이 달린 동력선에는 아버지와 아들, 조카, 한 가족이 선원으로 타고 있었다.

낡고 작은 배가 바다 한 가운데서 동력이 꺼져 빙빙 돌 때는 바늘만 달린 낚싯줄을 나눠 주며 고기를 잡으라고 했다.

선장이 모터를 손보는 동안 연장자인 맏아들이 삿대를 저어 작은 무인도 해변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선교사님은 야자나무를 흔들어서 딴 코코낫 열매 과즙을 마실 수 있게 손질해서 나눠 주고, 저절로 떨어져서 바짝 마른 야자껍질을 모아 물고기를 구워 주었다.

어설프게 싸온 쌀밥에 구운 생선을 얹어 도시락김에 싸서 먹는 새참이 꿀맛이었다.

다시 배가 모터 소리를 낼 때만 해도 웃음 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어두워지기 시작한 바다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일렁이기 시작한 파도는 점점 거세지고 배는 성난 파도를 타고 솟아올랐다 내동댕이쳐졌다. 빗줄기가 점점 세차지면서 배에는 물이 차올랐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듯 배가 전후좌우로 요동을 쳤다. 이미 예정된 도착시간을 훨씬 넘기고 있었지만 둘러 보아도 불빛 한 점 보이지 않고 사방은 점점 더 어두컴컴해졌다.

배를 붙들고 몸의 중심을 잡으랴 물을 퍼내랴 고함을 질러도 소통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두려움이 깊어졌고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앞만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참회의 기도를 하는 듯 했다.

쏟아지는 비가 얼굴을 세차게 때렸고 온몸은 흠뻑 젖었다. 쏟아지는 비가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은 빗물이나 바닷물이 차갑지 않고 미지근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의 염려와는 달리 배 가장자리를 맨발로 밟고 다니며 돛을 점검하는 젊은 선원들은 민첩하고 침착하기만 했다.

평생 바다에서 살며 바다의 다양한 얼굴을 보아온 그들은 바다에 대해 깊은 믿음을 가지고 교감을 하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오직 손전등 한 개를 장비 삼아 온가족이 생업에 나선 것이 배 한 척이 전재산인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깜박이는 등대가 보이고 난 후에도 항구는 멀기만 했다. 배는 밤을 꼬박 새고 나서야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여섯 명의 표류객은 비틀대며 배에서 내리고 여섯 명의 뱃사람은 다시 울부짖는 바다를 향해 배에 올랐다.

"괜찮겠느냐, 쉬었다 가지."

우리의 권유에 선장 아버지는 싱긋 웃으며 '돌아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젊은 선원들은 배 가장자리를 뛰어다니며 돛을 재정비 했고 선장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온 열두어 살의 막내 선원은 엔진 위의 따뜻한 나무 판자 위에서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죽음의 위험에 맞닥뜨려 겁에 질렸던 그 해 크리스마스 무렵의 항해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오르곤 한다.

그 때 내렸던 한바탕 비는 수많은 야자나무를 키워 달큰한 과즙을 채우고, 바다를 뒤집은 태풍은 바다 속의 물고기들에게 새로운 산소를 듬뿍 주었을 테지만 내게 기억되는 폭풍의 바다는 그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오늘도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라는 예보가 있다. 실시간 태풍의 경로를 보니 인공위성에서 찍은 10초짜리 동영상이 태풍의 눈과 바람의 방향을 알려준다.

살다보면 그와 같이 큰 바람과 파도와 비의 느닷없는 위협을 받을 때가 있다. 자연현상에는 다 이유가 있으며 인간의 이기심에 비해서 자연은 어머니 같이 오래 참고 아버지처럼 너그럽다.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자정을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다시 회복을 위한 심호흡을 하기도 한다.

나날의 부질없는 염려와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왕좌왕 하다가도 갑판 위에서 잠들었던 막내선원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버지와 바다를 믿고 잠들 수 있었던 아이의 작지만 큰 평화를 간절히 누리고 싶다. 누가 근심함으로 세상을 털끝만큼이라도 바꿀 수 있으랴.

필리핀 먼 바다에서 시작된 초속 43미터의 태풍 바비가 무서운 속도로 올라온다는데 서울의 아침 하늘은 아직도 환하다.

'Rocking Roll Again' 노래를 틀고 아침체조를 시작하며 밤새 부어오른 근심과 염려를 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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