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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막삼 Aug 28. 2020

너는 정치하면 잘하겠다. 선동을 잘해서.

타인에게 들은 가장 기분 나쁜 말

영화 <정직한 후보>



"과장님, 저희 OO호프에서 맥주 한 잔 하고 있는데 퇴근하시면 여기로 오실래요?"
"누구누구 있어요?"
"거의 다 있어요 ㅋㅋㅋ"


그 날 따라 아침부터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더니 평소보다 일찍 업무가 끝나서 기분이 굉장히 상큼했다. 내일 할 일이 뭐가 있나 정리하던 중에 같은 팀 대리님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을 먹지 못한 터라 출출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회사 옆 건물 호프집으로 냉큼 달려갔다. 


기획팀 거의 반이 넘는 인원이 모여있었고 왼쪽은 여자, 오른쪽은 남자 누가 선이라도 그은 것처럼 앉아있었는데 딱 중간에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연락했던 대리님이 그 의자를 통통 치면서 자리에 앉으라 했다. 다들 일도 일찍 끝났겠다 신나게 한 잔씩 걸쳤더니 텐션이 살짝 높아진 상태였고, 조금만 더 마시면 간당간당한 사람들도 보였다. 돈까스를 우걱우걱 먹으며 무슨 이야기를 했었나 살펴보다 내 오른쪽 그러니까 남자가 몰려있는 테이블에서 앉은 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남북관계도 아니고 38선처럼 반반 나눠서 앉아있는 모양이 불만인 한 사람이 섞어서 앉자는 제의를 했다. 그는 다른 회사에서 우리 회사로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이래저래 평판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분을 A라 하겠다. 큰 소리로 자리를 지정해주듯이 말하는 A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상사였고, 강압적으로 말하는 모양 때문에 다들 엉덩이를 뗄까 말까 고민하고 있길래 나는 여전히 돈까스를 우걱우걱 씹으며 에이~ 대학생 미팅 나온 것도 아니고 어디 앉고 뭐가 중요해요~ 그냥 편하게 마시자고 이야기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다시 웅성웅성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자리까지 옮겨가며 왜 남자 여자 섞어 앉아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한 말이었다. 회사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다른 직원들과 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더라면 본인이 직접 자리를 옮겨가며 인사를 했으면 했지 술집에서 접대부 고르듯 너는 여기에 앉고, 너는 쟤 옆에 앉아라 이런 식의 행동은 올바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지켜보고 있을 정도로 나도 바보는 아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화장실을 갔다 오거나 담배를 피우러 다녀오면서 자연스럽게 자리이동이 있었다. 나는 계속 돈까스 앞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A는 늘 나의 대각선에 앉아서 자신에 대한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주었다. 취기가 있는 막내에게 계속 술을 마시게 하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자 직원에게 인생을 모른다며 욕을 섞어가며 타박을 주거나 회사에 너무 편하게 입고 다닌다며 상대방의 옷차림을 지적할 때마다 나는 A의 말에 가벼운 농담을 섞어서 그러지 말라 받아치고는 등을 돌려 돈까스에 집중하거나 연예인 누구의 잘생김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에 집중했다. 


영화 <정직한 후보>


ㄱㅁㄹ 과장은 정치하면 잘할 것 같다. 선동을 잘하네. 
국회의원이 딱인데?


어깨너머로 저 말이 들려왔다. 들으라고 한 말인지 혼자 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A가 뒤돌아있는 나를 향해 저 말을 던졌고, 나는 그대로 들었고, 내 왼쪽에 있던 대리님은 인상을 팍 쓰고는 A 쪽을 쳐다봤고, 오른쪽에 있던 내 동기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멱살이라도 잡을 표정이라 일어나지 못하게 어깨를 누른 거라고 했었다. 


뭐 선동을 잘해? A의 눈에는 자기가 하는 말마다 아니다, 그러지 마라 말하는 내가 잘못된 사람이었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막 내뱉는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니꼽게 보면 선동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었다. A의 개소리를 우스갯소리로 받아치며 분위기를 쇄신해보려고 건배제의를 하는 나의 제스처를 동의를 갈구하고, 분위기를 그런 쪽으로 몰아가는 거라 생각할 수도... 아니 없다!!


막내들은 첫 회사에 들어와 회식을 얼마나 겪어봤겠으며,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 그 자리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내뱉는 상사를 그저 상사라는 이유로 듣고만 있어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으며, 말 끝마다 '형이~ 선배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구박하는 말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남자들은 어떻고. 


처음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리더가 여성분이셨는데 항상 당당했고,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분이셨다. 곱절로 갚아줘야 한다고 배웠다. 그나마 술자리라 술기운이겠거니 하는 마음에 농담을 섞어 반박했지 정말 진지해야 하는 자리였으면 논리 정연하게 틀렸고, 잘못되었다 말했을 거다. 남자 여자 성별을 떠나 꼭 저렇게 자기는 모든 게 잘났고, 잘했고, 옳다고 생각하고 타인을 깔아뭉개면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의 생각이 얼마나 우매했는지, 사람들이 너를 얼마나 하찮고 불쌍히 생각하는지 되짚어주고 싶다. 


인생을 통틀어 생각해보면 A가 던진 말이 제일, 최고로 기분 나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처럼 생생하게 기분이 나쁘다. 뼛속에 박혀있는 기분이다. 선동이라니. 참나. 

그 이후로 1년 정도 A와 같이 일을 했고, 그의 언행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퇴사했다. 지금은 얼굴을 전혀 보지 않는 사이인데 가끔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만 봐도 선동?? 선도오옹????? 생각이 난다. 단단히 박혀있다. 아주 인상적인 나쁜 말이다.



사람이 상처를 통해서 성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때 나를 할퀴고 지나갔던 상처는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성장은 늘 다정한 사람들 덕분이었지.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나를 상처 내려고 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곱씹는 말이다. 다정한 사람들이 나에게 주었던 포근한 말과 배려를 생각하면서 이겨낸다. 뼛속에 박혀있는 말 따위 상처를 냈을지언정 아물지 않는 건 아니니까. 친구들에게 A에게 들었던 모욕적인 말들을 들려주면 너도나도 회사에서 들었던, 학교에서 들었던 기분 나쁜 말들을 쏟아낸다. 다들 이렇게나 뼛속에 담고 살았구나. 나는 그들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줘야지.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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