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의 기술,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
경험의 세계에서 0이 1로 바뀌는 순간,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내 미래의 무수한 갈래가 다시 무수한 갈래로 쪼개진다. 무수의 거듭제곱으로 변하는 무수한 미래가 두려우면서도, 1의 세계를 영영 궁금해할 바에야, 1로 가보는 게 낫다.
10여 년 전, D가 “같이 파리에 가지 않을래?”라고 제안했던 그 순간부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올해 초, 파리에 갔다. 10여 년 전 여름, D와 함께 걸었던 튈르리 정원엔 메마른 나뭇가지들이 겨울바람에 따라 휘영청 흔들렸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눈으로 좇다가,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눈에 담으며 행복해하던 D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자연광으로 들어오는 전시실 벽을 가득 채운 수련의 풍경이 어둑한 새벽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그 강렬한 감정에 대한 표현을 「여행의 기술」에서 발견하고 D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삶을 고양한다”라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3년 가을에 탐험가나 학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는 일과 내적이고 심리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이용하는 일을 구별했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2014, 청미래, p.146
D와 함께했던 파리 여행은 낭만적이고 가난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 우린 바게트로 허기를 달래며 바토무슈를 탔고, 1L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며 걷고 또 걸었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매일 밤 자기 전 서로에게 물었다. “우리,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의 결론은 “어쨌든 계속 가보자.”였다.
뽀송뽀송한 유럽의 여름 햇볕을 받으며, 조그만 발을 요리조리 흔들며, 불안한 우리의 마음도 주렁주렁 매달고 파리의 거리와 공원들을 걸어 다녔다. 쾌활해진 우린, 앞뒤로 팔을 흔들며 표표하게 날아다녔다. 파리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에서 황유미 작가가 말했다.
그리고 갈팡질팡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부딪치고 깨닫는 과정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이렇게 당부하고 싶다. "경험을 축적하고 깨닫는 시간을 자린고비처럼 아까워하면 안전할 수 있겠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경험을 한 너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될 거야. 만약 아까워해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99프로로 슬픈 일이고,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게 될 거야."
- 구달, 이내, 하현, 홍승은, 황유미,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 2021, 이후진프레스, p.234
파리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D와 나는 앞으로 여행을 계속하자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씩씩하고 열심히 살자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우린 여러 번 부딪혔고 작거나 크게 깨달았으며 느리지만 차곡차곡 경험을 쌓아 나갔다.
퇴근했을 무렵의 D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너와 새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그래! 꼭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