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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쪽지 Apr 06. 2020

사실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나에 관하여


처음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누구보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확신했다. 내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 대하는 태도,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보는지 등 살아가는데 확실한 생각과 확고한 신념이 머릿속에 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친구조차도 나를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나는 나를 잘 알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들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혹시 내가 틀에 박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닐까, 내가 고정관념을 두고 삶을 살아왔던 건 아닐까 고민을 하게 됐다.

    

나는 관계에 관대한 편이다. 처음엔 이런 내 성격대로 살다 보니 모든 사람을 다 챙기려는 마음이 강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감정을 원 없이 퍼주기도 했지만 얕은 관계마저도 진심을 다해 지키려 노력했다.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이름은 물론이고(친하지 않았어도) 그 친구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은 다 기억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들은 내게 "야 너 기억력 진짜 좋다.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기억력이 좋은 건 또 아니다. 길에는 눈이 어둡고 처음 만난 사람들의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한다. 타고난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모든 관계를 쉽게 여기지 못하는 성격에서부터 나온 것 같다. 한두 번 보고 헤어지는 관계도 아쉬워 쩔쩔매지만 막상 상대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혼자 상처 받을 때가 많았다. 내가 그들을 대하는 것만큼 그들은 모든 관계에 대해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상대에게 그 정도의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컸지만 돌아오는 상처를 겪어내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다 보니 인간관계에 힘이 많이 들었다. ‘기가 빠졌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은 컸지만 누군가를 새로 만난다는 건 꽤나 설레는 일이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나는 관계에 대해 관대한 편이라기보다는 관계에 예민한 편이었다. 모든 관계를 다 챙기려 하다 보니 인간관계에 힘이 많이 들었다. 정에 집착하고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항상 을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맞지 않은 관계는 애초에 가까이 두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나는 당신과의 대화가 불편해요.’하고 표정으로 드러났으니 말이다. 내 마음과 반대로 표정을 숨기는 건 가장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친해지고 싶고, 관심 있는 상대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런 확신이 생겼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꽤나 확신에 들어찬 말들이었지만 올해 들어 나는 내 확신이 그리 정확한 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시간을 둘러 세월과 맞닿았을 때 모두가 자신의 삶이 우선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으니 말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사람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됐다.


내가 그동안 사람들을 너무 오래 믿어왔던 게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언제 불러도 나를 기다려줄 거야'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내 곁에 영원히 있을 거야.' 하는 알 수 없는 믿음으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어느 날, 나는 수도꼭지에 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울었다.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누군가에게 서운함의 감정을 느끼고 실망의 두 글자를 빼곡히 걸어두고 떠나갔다. 내가 믿었던 것들, 내가 언제라도 놓아질 수많은 관계들, 어쩌다 보니 그 관계를 놓지 못하고 연명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그래, 뭐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면 '모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나는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너인들 나를 알겠는가.


모르는 것들의 투성이. 왜 살아가는가. 우리는 왜 관계를 지속해야만 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당신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단 한 단어로는 도저히 정의 내리지 못하는 불확실한 것들의 늪.


알지 못하는 것들은 오히려 확실히 아는 것보다 더 아이러니하고 더욱 놀랍다.

우리가 모든 것에 '왜?'라는 물음을 던질 때 비로소 '나'가 된다.

알고있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알려고 노력하는게 존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사실 나도 나를 잘 몰라.

편견으로 물든 잿빛의 삶, 그럼에도 살아가야하는 것.


매일 하루를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삶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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