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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호 May 25. 2023

[마음 3] 조건 없는 위로

사랑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점심시간이었다. 동료 기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사소한 질문 하나를 던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기자님은 왜 그렇게 하늘을 열심히 봐요?”     


퐁당 가라앉을 줄 알았던 질문이 마음에 통통 물수제비를 일으켰다. 머릿속 회로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기자가 “하늘을 본다고요?”라며 호기심을 내비쳤다. 물꼬를 튼 당사자는 출근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어가는 나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며 부연했다. 그걸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고? 순식간에 얼굴로 열감이 치솟았다. 다시금 두 사람의 이목이 내게 쏠렸을 때, 내 입에서 변명하듯 튀어나온 대답은 심상하기 그지없었다.

     

“나무가 너무 예뻐서요. 파릇파릇한 게 여름 같고.”     


두 사람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던가? 퍽퍽한 세상을 낭만적으로 산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것도 같다. 화제는 금세 전환됐고, 나는 평소처럼 그들의 이야기에 추임새나 넣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겠지.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이 실패하고 있어서요’라고 솔직하게 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역에서 회사로 가는 대로변엔 가로수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삭막한 도심의 아침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한 조각의 소중한 풍경이다. 그의 말처럼 나는 출근길에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청명한 하늘을 만끽하는 건 직장인으로서의 내게 허용된 작고 은밀한 사치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진정으로 누리고 있던 건 머리 위에 지붕처럼 드리운 초록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푸른빛을 뻗치던 나뭇잎들이 어찌나 기특하고 경이롭던지.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눈이 저절로 가는 것들에 나는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처음 그런 습관이 생긴 건 지난해 봄이었다. 그 무렵 짧게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었다. 호감은 있었으나 화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소개할 수 있을 담백한 사이였고, 앞으로도 안온한 궤도를 이탈할 위험이 없는 관계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게 있다. 어찌나 심성이 짓궂은지 꼭 평온한 시절에 찾아와 훼방을 놓는 골치 아픈 녀석. 한 번의 우연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우연이 거듭되면 그것은 결코 우연으로만 남을 수 없다.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해석되고 판단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나와 그 사이에도 몇 번의 우연이 개입했다. 자연스레 우연에서 의미를 읽어내려는 낮밤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우연들을 마주하게 됐는지, 우연들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버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강박적인 신중함을 지닌 나는 관계에 뛰어들기 전 그가 안전한 사람인지 검토하는 시간을 (지나치게) 충분히 가지는데, 그의 앞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으므로. 당신의 마음도 나와 같을까? 내가 알고픈 건 그것뿐이었다. 사랑 앞에 사람은 단순해진다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고백을 하면 확실해지는 문제였고 결심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무수한 밤들이 내게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사랑이라면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고민하게 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마음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지 않나. 흔해 빠진 영화의 클리셰처럼 혼자 하는 사랑은 계속되고야 말았다. 그래야만 한다는 대본이 있는 것처럼 감정은 착실하게 전개됐고, 진부하게도 이런 사랑은 꼭 외로워지는 법이었다. 그렇다. 그러니까 이건 거리에 들러붙은 껌처럼 질척거리고 초라한 짝사랑 이야기다.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삶이라는 게 타인의 시시콜콜한 연애 실패담에 귀 기울일 만큼 여유롭진 않다. 더구나 용기를 내어 털어놓는다 한들, 어렵게 꺼낸 고민이 재단당하거나 풍문거리로 전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을 믿지 않는 문제와는 별개의 일이다. 그보다는 내 사랑이 부정당하거나 훼손당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에 가깝다. 하루하루를 버틸 힘이 되어준 마음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온전히 보존하고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 자연이 유일하게 위로가 되어줬다. 여린 잎처럼 무른 마음을 다룰 땐 봄이, 가눌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무성해졌을 땐 여름이 공감해 줬다.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초록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내 마음을 누군가 이해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따라 나뭇잎도 색을 달리하며 공명해주는 것 같았달까. 5분도 되지 않는 짧고도 짧은 해방의 시간. 물론 그 시간이 없었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버텨냈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강인한 존재니까. 그러나 홀로 견뎌내려 했다면 얼마나 잔인한 시간이 되었을지 상상하기 두렵다.     

 

나의 이십 대에는 이 같은 짝사랑의 변주들이 인터루드처럼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 쉽게 누군갈 마음에 들이는 성격은 아니라 많지는 않은데, 어째 각기 다른 표정으로 일제히 외로운 시간이었다. 고백이라는 벽 앞에 수명을 다한 마음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도 든다.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예쁘게 꽃 피었을지도 모르는데.      


거듭된 짝사랑은 실패한 경험 이후 체득한 관성 때문이기도 하고, 내상으로부터의 회복이 느린 데서 기인한 필사적인 자기 방어기제이기도 하며, 단순히 부족한 용기의 방증이기도 하다. 때로는 굳이 고백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어차피 부스러질 사랑을 무엇하러 연애라는 거창한 단계로 발전시켜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외로웠다고 생각한 시절 속 나는 으레 짝사랑 중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않나. 혼자일 때는 멀쩡하면서 왜 사랑을 할 때 지독하게 외로워지는 걸까? 사랑은 외로움을 달래주는 마음이어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해야 하는 이유란 존재하지 않을 텐데. 이뤄지지 않는 짝사랑이라서? 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에도 나는 위태로웠다. 외롭지 않은 사랑은 해본 적이 없다.      


어렴풋이 추측해 본다. 어쩌면 그건 꽁꽁 얼어 있던 마음이 사랑의 온기에 녹아 취약해지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마음은 무방비 상태가 되고 날것의 감정들이 헐벗은 마음을 할퀸다. 이뤄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마음의 무게가 같지 않다는 불안감. 결국 이 사랑 또한 마지막이 될 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허무함. 딱딱한 얼음 갑옷으로 무장했던 마음이 연약한 속살을 드러내며 속수무책으로 망가지는 것.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렇다. 하여 차라리 사랑할 수 없을 때가 평안하다. 그런 믿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사랑을 온전히 멈출 수는 없었다. 사랑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겠다 다짐할 때 사랑은 기어이 찾아오고야 만다(고 믿고 싶다). 마지막 장에 근사한 해피엔딩이 쓰여 있다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외로운 마음이 외롭게 스러지지 않도록 우리는 의지할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 내게는 자연이 그렇다. 시선을 기대고 귀를 열어둔 채 온몸의 촉각을 맡기면 금세 평안해진다. 마음의 열도가 다할 때까지, 끓어오를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모든 마음의 성분이 증발할 때까지. 그렇게 지속해 온 시간들 덕분에 잔인한 사랑의 계절을 버텨낼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여담이지만, 지난봄 움튼 마음은 생각보다 오랜 계절을 통과해 냈다. 우기와 폭염이 교차하던 변덕스러운 여름을 통과하며 마음이 저물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가을날, 나는 홧홧하게 타오르는 단풍 앞에서 망치질당한 것처럼 뻐근한 마음을 앓았다. ‘이토록 얼얼한 마음은 가실 길이 없다. 매 순간순간마다 삶에 끼어들어 지긋지긋하게 괴롭힐 것이다.’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 듯 되뇌면서도, 나는 어느새 쌀쌀맞아진 바람결에 무심코 몸을 움츠렸다.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을 애써 소화시키기 위해 곱씹으면서 조금 아프게 생각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바야흐로 새로운 계절이 도래한다. 나무엔 한 장의 잎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돌아온 초록이 만발하는 봄. 나는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 보지 않는다.       


- 2022.11 & 2023.05


우기와 폭염이 교차하던 변덕스러운 여름을 통과하며 마음이 저물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가을날, 나는 홧홧하게 타오르는 단풍 앞에서 망치질당한 것처럼 뻐근한 마음을 앓았다.





마음 생태보고서



수심: ●●●○○




평소 열심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어쩌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용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하고마는 무모한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힐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에쿠니 가오리 지음, 소담출판사 펴냄)』 8-9p




외로운 짝사랑이 수놓이는 밤의 노래

1. i can't make you love me - 킨다블루 & 화사

2. 다신 사랑하지 않을 다짐 - 알레프

3. 아무렇지 않은 사람 - 카더가든

4.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 브로콜리너마저

5.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 잔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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