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 기억 연구의 권위자 줄리아 쇼의 <몹쓸 기억력>
얼마 전 거짓 기억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다. 계절학기 수업을 등록하고, 등록금을 납부한 뒤 수업 준비를 하던 때였다. 수업 첫날을 위해 공부할 자료를 찾으려고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홈페이지에서 파일을 찾던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내가 수업에 등록이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수강신청을 했고, 등록금도 납부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전에 친구가 등록금 납입일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어서 ATM기에 카드를 넣고 등록금을 계좌이체한 터였다.
중요한 사실이라 잊지 않기 위해 메모장에 적어두기까지 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행정실에 문의를 했더니 등록금이 납입되지 않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당황해서 카드사에 문의를 해보니 정말로 나는 등록금을 납입한 적이 없었다.
나는 애당초 ATM기에 카드를 넣고 등록금을 계좌이체한 적이 없었다. ATM기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는데, 내 두뇌에는 가상의 기억이 입력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수업 기간 내내 자신의 멍청한 기억력에 절망스러워하며 집에 누워있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냥 잊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ATM기를 이용한 가상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정신이 팔려서 집중을 못한 탓에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기억력이 최근 심하게 나빠진 것인지 궁금해졌다. 인간의 두뇌는 거짓 기억을 만들기도 한단 말인가?
이름도 무시무시한 <몹쓸 기억력>이란 책에 따르면, 그렇다. 인간은 가짜 기억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은 다른 기억과 유사한 거짓 기억을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다가 사실을 착각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기억력이 평균보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기억력이 그다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줄리아 쇼는 법정 심리학자로, 거짓 기억 연구의 권위자다. 자신의 기억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기억이 그렇게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읽으면서 '헉' 하고 놀라는 부분이 많았다. 내 기억력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책은 실제로 우리가 거짓 기억을 만드는 예를 보이기 위해, 실제로 거짓 기억을 만든 교수들의 실험을 소개한다. 2002년, 하버드 대학교의 한 연구진은 실험 참여자들을 상대로 디즈니랜드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를 수행했다.
어린 시절 디즈니랜드에 간 실험 참여자들에게 자신들이 미키 마우스와 악수를 했음이 분명하다고 짐작하게 하는 광고를 읽게 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그 사건을 실제 경험으로 확신했다. 물론 미키 마우스는 디즈니랜드의 마스코트이므로 실험 참여자들은 실제로 악수를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디즈니랜드에서 만화 캐릭터 벅스버니와 악수했을 수도 있다고 암시하는 내용의 광고를 보이자, 역시 실험 참여자들은 그 일이 실제 사건이라고 강하게 믿게 되었다. 이 실험 참여자들은 절대로 악수를 했을 리가 없다. 벅스버니는 워너 브라더스사의 마스코트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책은 이렇게 거짓 기억을 강화시키고 믿게 하는 실험들을 소개한다(물론 윤리 규정을 준수한 실험들이다). 읽다 보면 내가 이런 꼴이었을까 생각이 들어서 참담하다. 저자는 소중한 기억들도 찰흙처럼 이런 저런 모양으로 다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런 오류는 뇌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진짜 기억이라고 느끼지만 실제 사건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 기억 역시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현상이다. 거짓 기억을 믿어도 진짜 기쁨, 진짜 좌절, 심지어 진짜 정신적 외상까지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잘못된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면 기억에 담긴 정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적절히 이용해 우리 자신을 정의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 16p.
불완전한 기억이라면 당연히 거짓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때때로 확신하는 기억인데도 거짓 기억일 수도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우월 착각과 생존 편향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우월 착각이 있다고 한다. 우월 착각은 자신의 장점은 과대평가하고, 부정적인 면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전 실력이 평균이 넘는다고 생각한다. 집안일에 대한 부부간의 생각도 비슷하다. 부부를 상대로 일정 관리에 대해 기여한 바를 퍼센트로 표시하라고 하면 평균적으로 남성은 50%, 여성은 90%를 자기가 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서로의 기여도를 합치면 100%를 초과해 버린다.
'우리는 남이 한 일보다 자기가 한 일을 더 잘 기억한다. 배우자가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배우자가 한 일을 전해 들으면 우리는 그 일을 직접 했을 때보다 훨씬 덜 생생하고 덜 세세한 기억 흔적이 남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감각의 유입이 더 적기 때문이다.' -183p
우월 착각에 더하여, 인간에게는 생존 편향도 존재한다. 끝까지 살아남은 것에만 집중하여,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실패를 간과하는 경향이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자퇴했는데도 성공했으니 나도 자퇴한 다음 자수성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생존 편향의 예다. 우월 착각과 생존 편향 때문에 확신하는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억의 진실성과 정확성이 담보되지 못한다.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자신의 기억뿐만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들은 남의 기억도 내 것으로 그냥 가져다가 쓴다고 한다. 책에 소개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일화를 자신의 기억인 것처럼 말한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역시 절반의 사람들이 타인이 자기 일화가 아닌데도 자신의 일화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절반의 사람들이 타인의 기억을 자신의 것인 것처럼 말한 것이다.
책은 거짓 기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매우 흔한 현상이며, 기억에 아무리 확신을 가져도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믿을 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또한 경찰관이나 범죄 수사에 참여하는 이들이 거짓 기억에 속아 넘어갈 확률이 있음도 알린다.
책이 말하고 보여주는 실험의 내용이 너무 놀라워서, 읽다 보면 좌절감이 들 수도 있다. 이렇게 불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한 느낌도 들었다. 기억의 오류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 기억의 오류 가능성을 이해해야, 기억력을 과신하는 일이 줄어든다.
저자는 기억의 오류 가능성을 이해해야 "지금 구독 신청하고 지불은 나중에 하세요"라며 불완전한 기억력을 공략하는 마케팅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기억이 거짓이거나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자신에게 더 이롭고 편향에 물들지 않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책은 내 기억이 안전하다고 믿고 기억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기억에 대해 불안해하며 읽었지만, 읽고 나니 헛웃음과 함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