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유'에 관하여
3.1절 연휴의 느슨한 오후, 카페 창밖에는 이른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 한가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문득 ‘자유’라는 단어를 곱씹어보고 싶어졌다. 100여 년 전 독립을 선언했던 오늘, 이 단어가 떠오른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 같았다.
사실 '자유'는 너무도 오랫동안 사유되고 연구되어 온 개념이라, 나의 짧은 식견과 이 짧은 글로는 그 거대한 함의들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거창한 논의 대신, 내가 일상에서 절실히 체감해 온 자유에 대한 생각—내지는 다짐—을 적어보려 한다.
나는 인간이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 자유 의지를 빼앗겼다 느낄 때라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선택하지 못한 길 위에 서 있다고 느껴질 때, 이미 정해진 답을 따라가야 할 때 삶은 쉽게 무력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를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상태’로만 정의할 수는 없다. 자유는 사실 감정이 아니라 태도에 더 가깝다. 주어진 조건이 어떠하든,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태도 말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자유는 허락의 형식으로 주어진 적이 거의 없다. 3.1 운동 역시 지배층의 관대한 승인에서 시작된 사건이 아니었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먼저 독립을 선언했고, 그 선언이 역사를 움직였다. 언제나 자유는 먼저 말해지고, 그다음에야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다.
규모는 다르지만 이 원리는 가장 작은 단위의 관계 속에서도 반복된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린다. 부모가, 상사가, 혹은 사회가 조금 더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그 긴장이 오래 지속된다. 성인이 된 자녀는 독립을 원하지만, 부모는 여전히 보호의 이름으로 간섭한다. 이때 우리는 묻는다. 왜 나를 믿지 않을까. 왜 아직도 나를 붙들어 두려 할까.
그러나 질문을 조금 바꿔 보면 어떨까. 나는 정말로 독립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준비란 완벽한 조건을 갖추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그 결과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선택의 책임을 내 몫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자유는 허락받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내가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현실이 된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고 했다. 상황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나의 몫이라는 뜻이다.
결국 자유는 누군가가 풀어 줘야 하는 족쇄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손을 뻗어 풀어야 하는 매듭에 가깝다. 그리고 그 매듭을 푸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책임이라는 무게를 함께 짊어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해 본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그 쟁취는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움직임일 수도 있지만, 오늘 하루의 선택을 온전히 내 책임으로 감당하겠다는 조용한 결심일 수도 있다.
자유는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