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는 디자인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두려움보다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싫다. 상대에게 싫은 말을 하면 그 말들이 꼭 나한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굳이 불편한 말이 필요 없는 이들이 있다. 필요한 것들을 척척 알아서 하는 능력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사회생활 만렙 혹은 연애고수로 통한다. 이들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미리 파악한다. 소비자들 조차 전혀 모르고 있던 숨은 니즈를 찾아내는 순간 고수들에게 느꼈던 감정을 느낀다. 고객의 감동은 배가 되며 자연스레 충성심으로 연결된다.
추운 겨울날 새로 산 에나멜소재의 패딩점퍼를 입고 외출을 나간 적이 있다. 반짝이는 소재의 점퍼는 칙칙한 겨울날 무심하게 스타일리시함을 뽐내기겐 손색이 없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한겨울에 반짝임은 자칫 좀 추워 보이는 효과로 시즌감을 역행하는 느낌도 늘었지만 아무렴 어떠한 가, 멋쟁이들은 추울 때 더 춥게 입고 더울 때 더 덥게 입는다는 출처 없는 이야기가 맞을 거라며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었다. 당당한 건 당당한 거고 너무 추웠다. 손이 너무 시린데 장갑 가져오는걸 깜박해서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주머니 안 내피소재가 모직이었던 것이다. 외피의 차가운 반짝이는 재질감이 내피에도 당연히 연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가 따뜻한 모직소재 (합성모인지 정확한 소재를 찾아보진 못했지만)가 내손을 감싸주었다. 그 이질적인 소재의 사용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자마자 버퍼링 없이 손에 바로 온기가 전해졌다. 하루종일 주머니에 핫팩을 따뜻하게 품고 있다가 무심하게 내주머니로 누군가가 쑥하니 넣어준 듯한 느낌. 한마디로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다.
와 이게 디자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배려를 받은 느낌. 갑자기 나를 둘러싼 모두가 나를 위해 고민했다는 생각. 추운 날 스타일리시함을 잃지 않으면서 보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디자이너가 이렇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추워도 네가 멋지게 보이는 걸 포기하지 마! 그거면 돼!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소비자 입장에서 고려하는 일은 말 그대로 디자이너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다. 작가의 철학과 신념으로 완성이 되는 예술작품들은 철저히 작가주의적 성향으로 제작된다. 작품을 진행하다 보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을 땐 구도를 바꾸기도 재료 혹은 도구의 교체가 될 때도 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면 본인의 의도가 더 잘 표현되기도 한다. 예술은 과정에 좀 더 집중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디자인은 어떨까? 철저히 소비자 중심적 사고로 진행하는 디자이너의 작업 또한 예술작업과 비슷하다 진행과정에서 수많은 오류로 인해 수정과 보완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결과적으로 소비자니즈에 부합하는지 꾸준히 검증하고 테스트해보아야 함은 확연히 다르다.
예술은 과정에 디자인은 결과에 집중한다.
예술작품이 제작되었던 과정이나 역사적 배경 등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설명을 해주는 책이나 영화 가 많은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 보니 우린 그 작품 안에 담긴 다양한 가치와 상징성에 대해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된다. 말 그대로 작품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질문이 많아진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면서 작품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지만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는 힘이 생기곤 한다.
디자인은 제작과정에 대한 설명보다는 제품을 어떻게 멋지게 보일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신제품 쇼케이스에 제품 콘셉트를 잘 살려 이벤트를 펼치기도 하고, 컬렉션을 소개하기 위해 패션쇼장을 해변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만큼 디자인은 소비자들이 구매하고 싶게 만드는 제품을 둘러싼 다양한 매력적인 요소들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끌어올리는 것에 주목한다. 소비자들의 불편사항을 철저히 제거해 주고 불필요한 행동시간을 줄여 각자의 삶에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예술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하고 디자인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게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는 중요치 않다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사소한 변화는 우리를 더 멋지고 흥미로운 곳으로 이동시켜 준다. 말 그대로 삶의 질과 격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만나는 이들이 달라지고 그들의 대화는 내 삶의 더욱 확장된 공간으로 이끈다.
예술과 디자인을 통해 질문을 받고 나만의 대답을 찾아나가는 작은 시도들이 쌓이면 더 멋진 내가 되지 않을까? 아티스트들의 사물을 바라보는 경이로운 에너지와 디자이너들의 소비자를 이해하고 공감시키는 영민함이 부러워 글을 쓰게 되었다. 앞으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예술작품들과 대답을 해주는 디자인예시들을 통해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는 걸 경험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