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에서 찾은 노력 <안전로프의자>
며칠 전 직장동료 부친상으로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업무과열로 온몸이 활활 타던 내게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 자며 나를 식혀주던 후배도, 이메일 멘트 하나에 정색을 하며 눈을 흘기던 선배도 모두 그대로였다. 나의 30대를 같이 보낸 동료들을 만나니 치열했던 그때의 감정들이 떠올랐다. 일과 육아로 정신이 없던 그 시절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시간이 모자랐던 나는 인문학 독서에 푹 빠졌었다.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었던 출퇴근 시간에 독서를 하며 현실의 나를 잊을 수 있었다. 부당하다 여겨지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는 공자에게 달려갔고,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의문이 생길 때는 니체 품에 안겼다. 급기야 회사에 독서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다양한 글과 말을 나눴다. 일도 마찬가지였는데, 제품의 글로벌 도약을 위해 해외박람회와 디자인 콘퍼런스등에 참가하며 여러 밤을 지새웠다. 지극히 일을 줄여야 버틸 수 있는 시기에 일을 늘리고 넓혔다. 그때 잘 해냈었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니 뒷수습을 해줬던 건 남편이었다. 본인도 일로 바빴지만, 육아와 살림에 큰 도움을 주며 배려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7일간의 밀라노 출장을 다녀온 그날도, 남편은 아이 둘을 데리고 출국장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데 남편은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 긴 출장으로 화가 난 건 가 싶어 나도 같이 토라졌었다. 근데 아이들에게도 말을 안 하는 것이 이상했다. 알고 보니 그는 급성 후두염에 걸려 말을 하면 너무 아프다고 했다. 내가 없는 동안 야근이 이어지고 아침 일찍 애들 유치원 보내고 밥 챙겨주느라 면역력이 있는 대로 떨어졌던 것이다. 급기야 누우면 숨이 잘 안 쉬어져 삼 일을 꼬박 앉은 자세로 잠을 잤다고 했다. 출장기간 동안 시차가 안 맞아 카톡으로만 서로 안부를 묻다 보니 전혀 아픈 걸 몰랐었다. 일하는데 신경 쓰일까 봐 말을 안 하고 끙끙 댔다고 생각하니 안쓰럽고 고맙고 여러 감정들이 몰려왔다. 항상 그랬다. 상사를 같이 욕해주고, 중요한 발표 전날 의상점검도 빠트리지 않던 그였다. 아이를 키우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게 묵묵히 지지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꼬임이 인상적인 의자를 만났다. 수명을 다한 등산로프 매듭만으로 만든 재활용 의자로 스웨덴 회사'크리스 (Kryss)'의 직조 가구 시리즈 제품이다.
험한 산을 등산할 때 로프는 생명을 책임지는 중요한 도구다.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던 그 로프가 삶의 휴식을 주는 의자로 탈바꿈을 했다. 생동감 넘치는 컬러와 내구성 좋은 로프는 디자이너로서 탐나는 소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로프는 일반적으로 형태가 쉽게 변하는 소재다. 단단한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의자와 다르게 앉으면 고정되지 않는다. 그런 소재로 의자를 만들다니 의아했다. 하지만 유연한 소재 덕분에 앉으면 몸에 딱 맞는 편안한 의자가 되었다. 의자는 로프매듭만으로 만들어져 의자로 사용하다가 풀어서 다른 가구로 설계할 수 있었다.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변하는 로프시리즈를 보여 온 마음을 뺏겼다.
바쁜 와중에 일과 육아를 해낼 수 있었던 건 내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움직여 맞춰주는 로프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게 안전 로프였다. 지치고 힘들 때 의자가 되어 휴식을 주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땐 로프가 되어 든든하게 잡아주는..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은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 신입사원으로 만났던 후배는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됐고, 결혼 안 한 후배들은 결혼하기가 너무 힘들다며 푸념하며 질문했다.
“선배 결혼 할 사람을 만나면 딱 알아볼 수 있나요?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대 만나기가 너무 어려워요.
오래전이지만 그때의 나도 같은 생각으로 불안을 안고 있었다. 새롭게 만나는 변화 앞에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길이 탄탄대로 일지, 수많은 장애가 길을 막고 있을지 예측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로프다. 높은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로프를 타고 올라가 넘고, 때론 의자가 되어 쉼이 되어주는 그런 든든한 안전 로프 같은 조력자를 만나야 한다고 후배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글쎄, 딱 이 사람이다라고 만나자마자 번쩍이진 않더라! 난 만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걸 보며, 이 사람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 방법이 나와 잘 맞는지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결혼 후엔 여러 개의 산을 넘고 또 넘어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