닦을수록 보배가 된다
내 이름은 수진이다. '닦을 수, 보배진'. 닦아야 보배가 되는 이름.
시대마다 인기 있는 이름이 있다. 내가 태어난 시절에는 수진, 지영, 은정 등의 이름이 인기 있었다. 같은 반에 내 이름과 같은 이들이 항상 있었고, 나는 그들과 다른 점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 이름은 '빼어날 수', '보배진'이라는 것을. '왜 나는 빼어난 보배가 아닌가!'라며 입을 삐쭉이던 때가 있었다. 그 이름 때문일까! 나는 노력하지 않으면 생기가 떨어진다. 운동, 독서, 글쓰기등 하루 루틴을 하지 않은 날은 온몸이 찌뿌둥하다 못해 신경질적이 된다. 게으름을 피우면 불편하고, 부지런히 갈고닦으면 편안해진다. 이름이 내린 저주라 생각했다.
나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관심 있게 보는 게 있다. 바로 주인공 이름이다. 전체 줄거리, 화면을 채우는 뛰어난 미장센 못지않게 주인공의 이름이 관전 포인트다. 이름으로 작품 전체 분위기와 인물 성향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통해 내가 생각한 작품의 내용과 실제 스토리를 비교하는 일이 즐겁다. 이런 흥미로운 놀이가 시작된 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으면서였다.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은 '요조'였다. 부드러운 어감과 '요조숙녀' 이미지가 떠올라 조용하고 단아한 여자주인공이라 생각했다. (요조숙녀는 중국 주나라시대 『시경(詩經)』 에서 유래된 말로 겉과 속이 단정하고 고운 여성상을 가리킨다.)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다. 주인공은 잘생기고 익살스러운 남자였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요조'라 짓다니 수많은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제 일본어 '요조 (ようじょ)'는 어린 여자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남자 혹은 여자이름으로도 잘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더욱 작가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짙어졌다.
'요조'는 밝고 유쾌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끝없이 자신을 혐오하고 '나는 인간으로서 실격이다'라 느낀다. 늘 소외감을 느끼며,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자신을 감춘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며 섬세한 감성을 '요조'라는 가냘픈 이름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추했던 주인공의 모습이 어느 정도 비슷하게 닮아있었다. 이름으로 풀어내는 나만의 수수께끼 게임 같아. 책을 펼치며 몰입의 속도가 빨라졌다. 서유미작가의 『끝의 시작』주인공 '여진'은 마음의 흔들림이 강한 여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유정 작가의『종의 기원』의 주인공 '유진'은 평범한 이름뒤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나 날 선 눈으로 보게 되었다.
우디앨런의 작품『레이니데이 인 뉴욕』의 남자주인공의 이름은 '개츠비'다. 이름을 듣는 순간 자연스레 『위대한 개츠비원』가 떠올랐다. 겉으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소설 속 '제이개츠비'처럼 외적인 화려한 삶을 그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개츠비 역을 맡은 '티모시 살라메'의 등장만으로 외적인 화려함이 쏟아졌다. 소설 속 '제이개츠비'는 '데이지'를 자신의 미래라 여기며 진지하고 절박하게 그녀를 쫒는다. 영화 속 '개츠비' 또한 여자친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이다. 역시 그런 그에게도 화려한 슬픔이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 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우연히 만난 이들을 통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찾게 된다. 소설 속 '제이개츠비'의 슬픈 결말을 상상했지만 다행히도 '레이니데이인 뉴욕' 속 '개츠비'는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끝이 났다.
이름을 들으며 유추해 보는 행위로 작가의 의도를 파헤쳐 보기도 하고, 새로운 결말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작가와 감독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닌지 그 의도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작품에 작가와 감독이 되어 스핀오프를 그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이 밀려왔다. 끊임없이 닦고 공을 들여야만 빛을 낼 수 있는 내 이름이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닦아내다 보니 먼지에 쌓여 있던 새로운 물건을 발견하는 것처럼 자주 만나는 작품들의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저주가 아닌 축복받은 이름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 보배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보배가 되어가는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