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불씨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 생에 처음 겪는 놀라운 소식에 우리 부부는 터질듯한 기쁨과 동시에 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양가 가족들의 축하가 이어졌고 무튼 설레고 흥분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뜨거운 환호뒤 다음날 출근을 하려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15년 전 나의 전 직장 H사는 제조기반의 회사로 남직원이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규직 여직원이라고는 디자인실 직원들이 10여 명이 다였고, 나머진 비정규직 직원들이었다. 여자 선배들의 대부분 미혼이거나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없었고 출산을 한 선배들은 모두 퇴사했다. 아니 퇴사를 당했었다. 정확히 입사 후 일 년 만에 결혼을 했으니 직장생활을 한지 이년이 채 안된 새내기 직장인이었던 나는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걱정해야 했다. 경력직으로 입사한 덕에 굵직한 프로젝트에도 빠르게 투입되었고, 열정적으로 일을 한 덕분인지 평가 또한 좋았다. 업무에 대한 욕심이 커지는 시기였다. 때문에 임신 사실을 알리기가 더욱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불러오는 배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 인사권을 쥔 임원이 새로 부임했다. 해외에서 긴 시간 일하며 살아온 그는 자녀가 없었다. 내 상황을 공감하기 어려운 분일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었다.
부임 후 개별 상담이 진행됐다. 다행히 그는 내 인사평가와 팀원들의 레퍼런스를 통해 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용기를 얻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임신 6개월이지만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고, 육아휴직은 사용하지 않고 출산휴가 3개월만 쓸 예정이니, 공백이 크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성장할 나를 지켜봐 달라고 덧붙였다.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그러나 내 신념은 흔들림 없이 전달했다.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임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그 순간, 뱃속의 아이가 내게 용기를 건넸던 것 같았다. 휴가 전 나는 다행히도 수많은 출장과 야근에도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체력에 감사했다, 그리고 출산예정 5일 전 휴가를 냈고, 예정일보다 3일 빠르게 출산을 했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아이를 품에 안았고 동시에 3개월 후 무탈하게 업무복귀를 꿈꿨다. 아이가 출산한 날, 아이가 눈 맞춤을 하고 활짝 웃었던 날, 목을 가누던 날 모두 사진 찍어 임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사의 배려와 믿음 덕에 아이가 건강히 자라고 있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D-00"
지금은 출산장려정책으로 출산 후 복귀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그때 나는 복귀가 가능할지 불확실했었다. 지금생각해 보면 저렇게까지 문자를 보냈어야 했나 싶지만, 출산 휴가 전까지 내게 응원의 말을 건네주던 임원에 대한 고마움보단 조바심이 만든 행동들이었다. 그땐 너무 간절했었다. 그렇게 복귀 한 달을 남긴 어느 날, 나는 수없이 울리는 진동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재우고 나온 사이에 카톡과 문자가 빗발치게 울려댔고, 부재중전화가 10통이 넘게 왔었다. 내게 이렇게 전화올일이 없는데 이건 무슨 일이 인가 싶었다. 다들 빨리 회사게시판을 확인하라고 성화였다. 오랜만에 들어간 회사게시판에는 인사발령이 떠있었다. '아.. 직무와 상관없는 부서로 발령이난 건가?' 지방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실 000 대리 승진발령'
출산하고 육아하느라 내가 승진대상자인 줄도 몰랐다. 아니 대상자인들 출근을 할 수 있느냐 라는 중대한 문제 앞에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축하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H사 최초 출산 후 복귀한 여직원이자, 출산 휴가 중 승진한 최초의 직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후배들한테 듣기로 아직도 관련된 일이 있을 때마다 회자된다고 한다. 그 뒤로 또 한 번의 출산휴가와 두 번의 승진을 누락 없이 한 뒤, 15년간의 H회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시댁이 마트를 운영하기 시작한 건, 둘째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아이를 봐주시던 어머님이 사업을 위해 원주로 내려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허둥지둥했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내 일상과 삶의 균형이 한순간에 흔들릴 것만 같았다. 겨우 산 하나를 넘으면 더 높은 산이 눈앞에서 기다리는 숨 막히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워킹맘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마트를 처음 운영하는 시부모님들 또한 나와는 다른 이유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직장일하며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싶어 고민하다 마트 로고디자인과 브랜딩, 인테리어 자재 선정 등을 도왔다. 그 뒤로 몇 번의 도움을 요청하셨고, 회사 일을 마친 뒤, 집에 돌아와 S마트 10주년 기념행사와 리브랜딩 작업을 이어갔다. 그 뒤로 마트운영을 도와주면 어떻겠냐 물어보셨고 며칠 뒤 나는 차장 승진소식을 전했다.
그래, 네가 즐겁게 일하니 너무 보기 좋다.
회사에서 네가 해보고 싶은 거 원 없이 다해보고 퇴사하거라.
아버님이 전하는 승진 축하인사에 나는 다짐했다. 회사에서 쌓은 노하우들을 퇴사 후 모두 S마트에 쏟아내겠다고. 그리고 난 퇴사 후 S마트로 향했다. 그간 써 내려간 글처럼 마트 운영은 만만치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과 세세하게 챙겨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필요했던 건 재무 감각이었다. 그간 디자인업무에 전념하던 나로서는 경영의 언어라 불리는 회계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으니, 말도 못 하는 아이가 회사를 끌어가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관련 공부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방송통신대학 금융회계학과에 편입했다. 그리고 회계원리와 기업재무, 세법등 기초적인 금융지식들을 쌓으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고 있다. 그동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믿었던 내가 본 새로운 세상은 생각보다 한 없이 넓고 깊었다. 이렇게도 모르는 게 많았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겸손해지고 조심스러워졌다.
S마트로 첫 출근을 한날 남편이 물었다.
"사람들이 아들이 아니고 왜 며느리가 출근하는지 안 물어봐?"
그 질문을 듣고 보니, 나도 궁금했다. 어머님 아버님은 왜 나를 지목하신 걸까? '두 아들과 두 며느리 중 왜 나만 S마트에서 일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첫아이를 어머님과 공동 육아를 했었다. 어머님은 내가 직접 일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일을 할 때 쏟는 에너지를 보신 것 같았다. 틈틈이 사업운영에 도움을 드리고자 물었던 많은 일화들도 긍정적으로 반영된 거라 생각이 했다. 다른 자식들이 경영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마트운영에 궁금한 게 많았다. 국내외 마트를 갈 때면 경영자 입장에서 마트를 바라보며 S사에 도움이 될만한 프로모션이나 시스템을 눈여겨보고 전달했다. 그리고 "앞으로 유통은 온라인배송등으로 다양하게 변모되겠지만, 오히려 사람을 만나며 구매하려는 욕구도 커질 거예요!" 라며 S마트가 온라인배송으로 휘청일 때 응원을 해드리기도 했었다. 어머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사장처럼 일하는 직원은 꼭 사장이 되더라!"
일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붓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보인다는 말로 들렸다.
사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꼭 입 밖으로 꺼내야 마음이 놓인다. 내 생각은 불씨와 같다. 하고자 하는 바를 말로 꺼내지 않으면, 그 불씨는 내 안에서 금세 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늘 살기 위해 불씨를 꺼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는 그것을 말과 글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 작은 불씨들은 희미하게 켜졌다가 꺼지기도 했고, 다른 생각들과 만나 불길로 번지기도 했다. 불이 사그라지면 다시 불씨를 살렸고, 때로는 상황에 맞는 다른 불을 켜기도 했다. 그렇게 켜진 작은 불빛들이 모여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면, 세상이 조금은 덜 두렵게 느껴졌다. 불빛이 있는 곳엔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안에서 나는 도움을 얻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꾸준히 해온 일은 단 하나였다. 꺼진 불씨를 다시 켜는 일.
모든 일의 시작은 내 안에서 켠 불씨들이었다. 출산 후에도 내가 원하는 일을 놓지 않으려 했던 것도,
마트를 운영해보고 싶어 수많은 대안과 솔루션을 제시했던 것도 모두 그 불씨에서 비롯됐다.
왜 내가 S마트에 출근하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마도 내가 켠 불이 가장 밝고, 화력이 세서가 아니었을까?
음. 시부모님께 물으면 “글쎄, 네가 체력이 제일 좋잖니?”라는 답이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면 어떤가! 내 불이 꺼지지 않고 켜져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