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김장시즌
'전라도 해남이냐, 강원도 횡성이냐!'
여행지를 고르기 위한 고민이 아니다. S마트 고객들이 김장철 배추의 원산지 선택을 두고 망설이는 풍경이다.
해남배추와 횡성배추는 무엇이 다를까? 이 두 배추는 서로 상반된 지역에서 재배된다. 해남은 남서쪽 바닷가의 따뜻한 해풍지대에 위치해 있다. 해남에서 자라는 배추는 바다의 염분을 머금어 속이 달큼하고 부드럽다. 평지에 따뜻한 해풍이 일정하게 불어와 많은 양의 배추가 풍성하게 자란다. 횡성은 중동부 내륙의 서늘한 산간지대에 위치한다. 이 지역의 배추는 낮과 밤의 온도차를 견디며 단단하게 자란다. 횡성배추는 소량재배되어 양이 제한적이고, 쉽게 무르지 않아 프리미엄 배추로 취급된다. 가격차이에 대해 묻는 고객들이 많아 두 배추의 차이를 비교해 가며 설명하고 있다.
배추뿐 아니라, 고랭지 작물들 대부분이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분이 많고 포슬포슬한 태백감자, 단단하고 수분이 많아 아린맛이 적은 평창 무, 아삭하고 단맛이 높은 인제 시금치. 이 작물들 모두 낮은 온도 탓에 성장 속도는 느리지만, 낮은 온도 덕에 해충피해가 적고 맛이 진하다. 서늘하고 습한 환경으로 수분을 오래 간직하면서 저장기간도 길다. 과정이 느리고 더딜수록 맛은 정교해지고 신선함은 오래간다.
나는 유난히 시간이 걸리는 일에 관대하지 못하다. 한국인 특유의 급한 성격에 빨리 눈앞에 결과가 보여야만 편안해지는 성격이 더해졌다. 질문을 하고 혼자 답해버리기가 일쑤인 나에게 고랭지 작물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단했다. 나는 일이 빠르게 처리될 때 안도감을 느꼈지만, 맛의 세계는 정반대였다.
해발 6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기온이 낮은 고랭지 지역은 안개와 서리가 끼는 날이 많아서 일조시간이 일정치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작지 경사도 심해 비가 오면 산사태를 주의해야 한다. 이를 방지하려면 뿌리가 깊이 박히는 호밀을 심어야 한다. 호밀은 산비탈이 파이는 것은 막을 수 있지만 밭고랑을 만들 때는 호밀 뿌리로 인해 오히려 번거롭다. 하지만 산사태를 예방하는 일이 중요하므로, 호밀을 심어 밭을 관리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까지 농사를 짓는 게 너무 바보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폴리(Folly, 어리석은 행동)라는 와인이 있다. 와인 이름이 폴리인 이유는 300m 고도의 45도 가파른 경사면에서 포도를 경작하고, 최고의 품질로 수확하기 위해 한밤중에 손으로 수확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칠레에서 상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쉬라를 재배한다는 것도 무모한 도전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칠레와인이 좋은 품질 와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1980-1990년만 해도 칠레 와인의 대부분 은 가성비 좋은 와인으로만 생각했다. 2000년 아팔타 밸리의 가파른 경사면에서 자란 ‘몬테스 폴리 쉬라’가 그 틀을 깼다. ‘이런 땅에서 와인을 만든다고?’라는 비아냥 속에서, 느림과 시련을 이겨낸 포도는 세상의 편견을 뒤집었다. 포도는 낮은 경사면에서 재배된 것보다 훨씬 더 작고 진하게 농축됐다. 타닌이 풍부한 포도 그대로 와인에 녹아 맛이 깊고 파워풀했다. 매년 3만 병 정도 소량 생산하는 (일부 유명 와이너리나 메이저 라벨의 경우 연간 15만 병 이상 생산하는 경우가 많다.) 몬테스 폴리 와인은 칠레와인을 프리미엄 와인으로 격상시키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느림과 더불어 시련이 있을 때 맛은 더 깊어진다. 고랭지의 작물은 찬 밤공기와 뜨거운 햇살을 오가며 스스로를 단단히 여물게 하고, 폴리 와인은 높은 경사면에서 거센 바람을 견디며 농밀한 향을 품는다. 척박한 땅과 비옥한 땅이 있을 때, 많은 이들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짓게 되는 이들은 시작점이 다르다며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서 시련을 이겨낸 농작물은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긴 시간 묵묵히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것들은 맛의 깊이가 다르다.
와인의 가치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테루아(Terroir), '땅이 만든 맛'이다. 와인의 시작은 언제나 ‘포도가 어디서 자랐는가’에 있다. 토양, 고도, 일조량, 강수량, 바람, 기후 등 자연조건이 포도 품질을 결정한다. 사실 포도도, 배추도, 사람도 테루아가 가장 중요하다.
비옥하다고 생각했지만 척박한 상황이 되는 경우가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다. 비옥한 곳에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광합성을 양껏 하면 된다. 하지만 척박한 곳이라면 내 안이 여물고 단단해지는 중이다라고 생각하고 버텨내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엔 깊이 있는 내가 있으리라 믿으며.
나는 해남의 달큼한 바람을 맞을 것인가!, 횡성의 차가운 밤공기를 맞을 것인가! 절임배추 앞에서 상념이 길어졌다. 어제오늘 하루 종일 배추판매가 많았다. 횡성배추가 해남배추에 비해 가격이 많이 비쌈에도 불구하고 7:3 압도적인 비율로 판매가 높았다.
단단하고 아삭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