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마트를 부러워말라.
추석이나 명절을 앞두고 각 마트들은 비상이다. 제수용품 및 선물세트 물량 확보에 총력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준비하지 않으면 좋은 물건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어서 서둘러 공판장에서 좋은 가격으로 물품을 확보하거나, 도매점을 통해 선점을 해야 하는 시기다. 이번 추석 제수용품과 선물세트 관련 회의를 하던 중 점장이 말을 꺼냈다. "이번 추석 때 A마트는 배 한 박스를 29,000원에 판매한다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소리 내지 못했다. 우리 마트도 서프라이즈 가격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A마트로 향했다.
나는 립스틱을 진하게 발랐다. 붉은 기운이 얼굴에 번지자 마음에도 불이 붙었다. 몸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내가, 그날만큼은 싸우러 가는 사람처럼 눈빛이 매서웠다. 그렇게 나는 조용히 A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이판사판이었다.
내가 세운 가설은 이랬다. ‘미끼 상품들을 전단지에 잔뜩 실어두고, 그로 인해 발생한 손실은 다른 제품의 가격에 녹여 마진을 맞췄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트는 그들이 높게 책정한 제품을 할인가로 내세워 홍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가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는 눈에 불을 켜고 현장으로 향했다.
과일 코너로 향했다. 전단지에 실렸던 29,000원짜리 배 상자는 실물이 아니라 사진으로만 전시되어 있었고 ‘사전 예약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직원에게 예약하겠다고 하자, 이미 모두 판매됐다고 했다. 추석 나흘 전이었다. 전단지만 보고 주문이 마감된 줄 모르는 고객들이 매장에 들렀다가, 자연스럽게 조금 더 비싼 배를 사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씁쓸한 마음으로 매장을 둘러 봤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A마트의 제품들은 대부분 저렴했고, 시설은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내 가설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A마트는 생긴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마트였다. 이전에도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그때 느끼지 못했던 ‘스마트함’이 더해져 있었다. 천장에는 LCD 모니터가 1미터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각 세션별 행사 상품이 약 5초 간격으로 화면에 번갈아가며 재생되고 있었다.
모니터 속에는 밝은 색감으로 구현된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상품 이미지와 가격이 일정한 리듬에 맞춰 바뀌고 있었다. 화면이 동시에 변하는 모습이 마치 왈츠 같았다. 나는 왈츠공연을 보는 사람처럼 넋을 놓고 서 있었다. 특별한 장치도, 거창한 시설도 아니었지만 S마트 천장에 걸린 현수막들과 비교하니 유난히 눈을 떼기 어려웠다. 내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S마트는 이번 추석에 매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시설투자가 들어가면, 직원들 보너스는 물론 물류 대금 지급도 빠듯해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마진 없는 가격이나 시설투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스마트한 매장에서 일하는 A마트 직원들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들은 말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며 묵묵히 자신들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몇 가지 상품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 직원들 역시 말없이 리더리를 찍는 소리만 들렸다. 깔끔하고 정돈된 매장이 오히려 거대한 냉동창고처럼 서늘했다. 얼얼했던 냉기는 S마트에 들어서자 스르르 녹았다. “어서 오세요!”라는 직원들의 따뜻한 인사에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 직원들의 인사 한마디가 이렇게도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추석 대응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나, S마트 생존전략이 시급했다! 사무실에 앉아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점장이 찾아왔다. 나는 A마트 시장조사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오전 회의가 끝난 후 내가 A마트로 달려가는 동안, 점장은 주변 마트 직원들에게 A마트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A마트 사정을 알게 되었다.
A마트는 넓고 쾌적한 매장과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차량 진입로가 불편한 탓인지 오픈 이후로 줄곧 매출이 부진했다. 그러나 최근 공격적인 투자와 파격적인 가격 정책으로 고객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A마트는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고 있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창업 후 1년 내 폐업률은 약 30~40%, 3년 내 폐업률은 60% 이상이라고 한다. 즉, 3년을 버티면 주변 경쟁 업체의 절반 이상은 이미 사라진다는 뜻이다.
관계자 말에 따르면 A마트는 꽤 오랫동안 자금난에 어려움을 겪었고, 더이상 운영이 어려워져 매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어렵게 나타난 매수자는 '3개월간 매출을 20% 끌어올리는 조건으로 매수하겠다'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마트 직원들의 고용승계는 조건에 포함되지 않았고, 직원들이 마음을 편치않은 상황이었다. A마트의 속사정을 듣고 나니 냉기 가득했던 분위기가 이해됐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격정책을 따라가면 안 됐다. 그들은 초 단기적인 관점에서 세운 젼략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황이 달랐다. 다만 추석 제수용품에서는 마진을 최소화하기로 하고 A마트에 없는 친절함을 무기로 대응하기로했다. 연휴동안 무거운 장바구니를 차까지 에스코트하는 서비스를 하기로 했다. 친절하고 힘 좋은 아르바이트생은 생각보다 구하기 쉬웠다. 신랑과 도련님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연휴에 다행히도 많은 고객들이 방문했다. 그 바쁜 와중에 갑자기 몸이 아파 휴가 낸 정육팀장 없이 정육팀은 멋진 팀워크를 보여줬다. 힘든 내색 없이 일해 준 직원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제품 수량 확보에 총력을 다한 점장, 그리고 오너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준 아르바이트생들 까지 모두가 이루어낸 작은 기적이었다. 다행히 직원들 보너스는 작년보다 더 많이 줄 수 있었다. 같이 고민하고 애써준 직원들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한 명절이었다. 하지만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연휴가 지나고 일주일이 된 지금 내게 굉장히 두려운 게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빗자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