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언어적 소통
만나서 회의를 하고 싶은데 언제 가능하실까요?
저희는 비대면으로 모든 업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S마트는 처음으로 SNS 광고 제작을 하기로 했다. SNS 광고는 처음이었기에 이 업계에서는 비대면 업무가 관례인가 싶었고, 오히려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던 내가 무례했던 건가 싶어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전화 통화도 안되고, 소통은 오로지 DM과 카카오톡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콘셉트와 기획 의도는 글로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 상품을 촬영하는 각도나 속도 전환, 레퍼런스 영상확인등 디테일한 작업은 만나서 이야기하면 금세 끝날 일이었다. 채소나 과일은 보이는 비주얼도 중요하지만 원산지나 원산지 특징등을 간략히 언급해야 했다. 그리고 내용은 내레이션으로만 들어가고 상품명과 가격은 텍스트로 들어갔어야 했다. 글로 설명하는 데 한계를 느꼈고, 결국 담당자가 직접 촬영하러 올 때 이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예상 밖이었다. 자신은 촬영만 하고 데이터만 전달할 뿐, 편집은 다른 사람이 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편집자에게 들은 내용을 전달하겠다며 카카오톡 메시지로 편집자에게 전달했다. 답답함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렇게까지 꽁꽁 숨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이 회사는 AI가 주도하는 조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 제작이 완료되었을 때, 결과물은 내가 처음에 전달한 내용 그대로였다. 상품들을 쭉 나열하며 읽어내는 방식이 다였다. 내가 촬영자에게 설명했던 디테일과 뉘앙스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말이다. 수정을 요청하자, 계약 전의 긴 약관 문구가 재전달됐다. 제작 이후에는 텍스트 수정 외에는 어떤 수정도 불가능하다는 조항이었다.
이 일은 광고 제작이 아니라 정해진 틀에 문장을 끼워 넣는 작업이라는 걸 깨달았다. 촬영자는 촬영만, 편집자는 편집만, 각자 업무가 세세히 나눠져 있긴 했지만 전체를 핸들링 하는 디렉터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콘텐츠와 높은 팔로워 수, 그리고 낮은 제작비. 그 조합 앞에서 나는 너무 쉽게 일을 진행시켜 버렸던 것이다.
며칠 전 각 파트 담당 책임자 들과 함께했던 회의시간이 떠올랐다. 아버님이 주재한 회의는 무거웠다. 작년대비 매출액과 이익률 감소, 재고처리문제에 대해 질책하는 자리였다. 직원들의 얼굴을 한 명씩 살펴보았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야채팀 팀장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달싹거리며 아버님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고,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직원은 다이어리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직원들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억울해했고, 누군가는 별생각이 없었으며, 누군가는 진지했다. 직원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이 하려는 말이 어느 정도 눈에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책상만 바라보던 이들 대부분은 변명하느라 바빴고,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적던 한 직원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세일상품엔 지난번 세일 품목과 겹치는 걸 빼는 게 어떨까요? 획기적으로 보이지 않아서요!"
회의 시간 동안 직원 간에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회의에 임하는 태도만으로 각자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특별한 독심술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눈길이 머무는 곳, 펜을 움직이는 속도, 고개를 드는 타이밍 같은 작은 행동들만으로 충분했다.
UCLA 심리학 교수 메라비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말보다 태도와 표정에서 더 많은 정보를 읽어낸다고 한다. 내가 광고 제작사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던 이유도 단 하나였다. 서로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 그 경계를 확인할 수 있는 신호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주, 새로운 제작사와 일을 시작하기 위해 통화를 했다. 앞으로 진행할 광고에 대한 콘셉트와 제작 시기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고 견적서를 받기로 했다. 잠시 대화를 나눈 뒤, 광고 담당자가 이렇게 말했다.
“현장에서 광고를 찍을 거라 마트를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원주로 가겠습니다. 언제가 편하실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번 광고는 왠지 다르게 흘러갈 것 같았다.